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어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말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사람들이 범한 죄를 사하려고 아들을 보내어 그 벌을 대신해서 받게 하셨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의 가장 기초적 교리에 대하여 한 단계씩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아들이라는 존재의 정체성이다. 많은 글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그러니까 낳아진 존재다. 사람에게 아들은 아버지의 뜻과 업과 재산을 이어가는 존재로 인식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와 뜻과 기업을 이을 자다.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의 모든 것을 이어간다는 것은 아버지 속에 있는 의와 뜻이 아들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냈다고 하는 것은 어떤 존재가 하나님의 의와 뜻과 기업을 이을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 간과하는 연결고리가 있는데 그것은 그 예수님은 장차, 곧 첫 번째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살아갈 사람들이 계속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 오라”,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하려 보내신 아들은 예수님 한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예수님 외에 다른 구세주가 있느냐? 그것은 아니다. 예수님 외에는 구원 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셨다. 이로 인해 세상을 구원하는 아들은 예수님만이 아니라는 것은 모순이나 괴변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영어의 관사 개념으로 이해하면 도움이 된다. 예수님은 the Christ이시고, 장자 이후의 모든 하나님 아들은 a christ라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리고 세상을 구한다는 것은 각 개인에게 인식되는 세상이 바뀐다는 의미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생이 그 십자가로 보여주신 하나님 아들의 의미를 바로 알게 되면 하나님 아들이 되고, 그는 자기에게 인식되는 세상을 구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은 바로 인생이 그렇게 자신의 세계를 구하는 하나님 아들이 되는 법, 곧 하나님 생명의 법이자 하나님의 뜻인 말씀을 십자가에서 보이시므로 사람이 그 십자가를 보고 하나님의 의와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그는 하나님 아들이 되고, 자기의 세상을 구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기의 세상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자기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하여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 하고 그것을 돕는 이가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치관 속에서 세상을 구한다는 것은 결국 이기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설명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는 낮아지는 분이고,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것은 낮아지는 것이 본성이 된 생명이 된다는 말임을 상기해 보면 자기의 세상을 구한다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싶어 하는 세상, 곧 자신이 벗어나고 싶어 하는 세상살이는 피라미드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서로 다투는 세상이다. 그것이 모든 사람이 속한 세상이다. 그 세상 속에서 겪는 갈등, 그리고 자기 욕심을 인하여 취하는 죄라 이름된 이익들 속에서 자신이 구원 받기를 원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범하고 있는 세상이 전부 바뀌면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가난이라는 문제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그리스도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분이 아니라는 말씀임을 많이 설명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런 세상을 구하는 분이 아니라는 의미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 역시 그런 세상을 구하시기 위함이 아니다. 예수님 역시 세상을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다. 그런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했다고 믿으려면 어떤 세상을 구했는지 정도는 설명을 하고 종교의 골격을 유지해야하는 것이 상식이겠지만 이런 것은 사람들에게 완전히 지워졌다.

 

세상을 구하러 오신 예수님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면 분명히 어떤 세상이든 구했어야 하고, 세상을 구했다면 그것은 천지개벽할 일인데 그런 변화가 있는 곳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가난한 자를 구하려는 세상은 예수님 이후에도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받으면서 구했다는 세상은 도대체 어떤 세상인지 관심도 없다. 어쩌다 생각해보면 세상이 바뀌지 않음을 깨달으면 종말론을 생각하고, 눈앞에 닥친 시험이나 건강이나 사업과 같은 자기 세상의 일을 구하기 위하여 높아지는 그리스도를 목 놓아 부른다. 그러나 희망의 대명사인 내일이 다시 동일한 어제가 되는 동안 그런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님이 구한 세상이 아니라는 분명한 현상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패자가 아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세상을 구했다. 그런데 사람이 인지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으로 인하여 세상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인지하지 못했다면 당연히 그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세상을 구했는데 자신은 아직도 자기 삶이 변하기를 바라고, 평안과 성공을 구한다. 평안과 성공을 구한다는 것은 평안하지 않고 성공하지 못했다고 여기기에 구하는 것이니 세상이 바뀐 것은 없다는 고백이다. 아직도 세상의 가난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회 문제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구원 받은 세상을 알지 못함이니 그 또한 구원이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기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므로 무엇인가 채울 것을 구한다는 것은 구원이 없는 것이다. 부족한 것이 신앙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럼 이제 예수님께서 구하신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알아보자. 앞서 잠깐 설명한 것과 같이 예수님이 구하신 세상은 우리 자아 밖의 세상이 아니다. ‘라는 사람이 속한 사회와 세상을 구하신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인식되는 세상이 바뀌는 구원이다. 성경이 괜찮은 표현으로 거듭남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거듭난 생명에게 세상은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즉 거듭나면 거듭난 사람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구하신 세상이다.

 

성경이 거듭남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말 그대로 다른 생명으로 다시 난다는 것이다. 많이 든 비유처럼 늑대가 양으로 거듭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늑대로 살 때는 초원의 풀은 양식이 아니었다. 고기와 썩은 고기가 자기 양식이었다. 그러나 양으로 거듭나면 고기를 먹지 않으려고 노력할 필요조차 없다. 양은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늑대로 사는 동안 고기가 부족하니 이 세상의 구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면 양으로 거듭나서 보면 고기가 부족한 세상에서 완전히 구원 받은 것이 된다.

 

따라서 세상에서 높아지려는 경쟁 속에서 겪는 많은 문제들로 인하여 곤고하여 구원을 갈망하며 자신을 높은 곳으로 이끌어줄 그리스도를 앙망하던 괴로운 세상에서 낮아지는 것이 본성인 생명으로 거듭나면 그 사람에게는 세상이 바뀌고 또한 자기가 인식하고 살아가는 세상 또한 구원 받아 변화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생명이 바뀌는 것이 곧 세상이 바뀌는 것이고,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시는 생명으로 거듭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구원하신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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