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는 사도로서 문안하고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주 안에 있음을 상기시키고 감사하면서 서신을 시작한다.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 사도의 이 문안에는 주목할 게 있다. 고린도 교회에는 모든 구변과 지식이 풍족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견고하며,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는 걸 언급한 점이다.

 

바울 사도의 이 문안은 칭찬성 문안과 권면인 듯 보이지만 세상의 지혜를 하나님의 지혜와 십자가의 능력을 대비시키는 고린도전서 흐름을 고려하면 구변과 지식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와 은사도 견고하고 풍성하다는 언급은 액면 그대로 칭찬이라 보기 어렵다.

 

구변과 지식과 증거와 은사가 견고하고 풍성하다면 신앙적으로 안정적이고 분쟁보단 화합하는 모습이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지식과 증거와 은사가 풍성한데 분쟁에 휩싸였다. 그것도 신앙적 관점에서. 그들이 가진 신앙적인 지식, 간증의 증거 그리고 많은 은사가 화목이 아닌 신앙적 주장을 펼치며 대립하는 분쟁의 도구가 되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아주 귀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그 귀함이라는 것에 매몰되어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을 세상의 꼭대기에 두려 한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세상에 없는 하나님의 이 존귀함은 낮아지는 데 있다는 걸 사람이 모른다. 이 어두움으로 인해 신앙적 가치 기준으로 더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을 높이 올려놓는다. 신학적 자격을 가진 사람을 강단 높이 세우는 게 바로 이것 때문이다.

 

알고 보면 하나님 말씀의 존귀함은 낮아지는 것

 

고린도 교회도 그랬다. 지식과 증거와 은사의 풍요 정도가 상대에게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지식이 더 많은 사람의 생각과 가르침을 상대가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내 말이 옳다는 주장이 부딪혀 분쟁이 되기 때문이다. 세례는 침례가 옳다는 것과 안수만으로 된다는 주장이 교단이 갈라진 것도 맥락이 같다.

 

이런 분쟁은 풍성한 신앙적 지식, 증거, 은사의 존귀함이 낮아지는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다. 존귀한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는 열어보면 십자가로 낮아지는 것임을 모르면 신앙적인 많음이 권세가 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성령만 오시면 알게 되는 말씀을 몰라서 공부한 신학을 수학했다고 대접받는 목사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신앙의 어떤 요소를 가지고 사람을 가르치려 하고 우위에 서려 하며 대접을 받으려는 것은 십자가의 도를 모른다는 증거다. 귀한 것은 높아지고 대접받는다는 세상의 가치 기준을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귀한 하나님의 의는 십자가라는 낮고 낮은 모습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신앙적으로 갈라지고 분쟁하는 이유가 세상의 지식을 좇기 때문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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