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는 육체의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가진 자들을 할례를 자랑하는 자들로 묶어서 정리한다. 그리고 그들은 할례를 자랑하나 자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고 말씀한다. 특히 그들은 자신이 육체로 의로워진 것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다. 바울 사도는 육체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가진 자들은 자신의 권유대로 할례를 받는 사람들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는다고 했다. 만약 육체로 의로워지려는 마음으로 할례를 받는다면 할례를 권하는 자들, 육체로 의로워지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고 성도들을 권면한다.

 

특이한 것은 십자가는 누구를 핍박하는 것은 아닌데 할례를 받게 권하는 자는 십자가로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약간은 특이한 이 말씀은 십자가가 우리의 양심을 찌르는 것임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다. 반면에 죄는 자신의 육신이 범하고 벌은 예수님께서 받았다고 믿는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십자가가 핍박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근본적으로 사람에게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다. 믿지 않으면 노하시고 벌을 내리시니 강요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그 뜻을 보이시고 사람의 선택 곧 순종을 기다리신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큰 희생을 치르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강제로 믿도록 하거나 강박하지 않으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서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뜻을 알지 못하고 살았음을 스스로 회개하고 예수님이 보이신 그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의 모습이고 무엇보다 육신 가진 자신의 운명이자 삶의 목적인 것을 고백하기를 바라신다. 즉 모든 것을 사람이 스스로 양심에 찔려 회개하고 거듭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핍박이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따라서 십자가의 핍박을 피하려는 생각은 하나님 구원의 섭리를 거절하는 것이자 양심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양심에 화인 맞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것은 양심의 어떠함이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 구원의 섭리를 거절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에 기초하여 바울 사도는 할례 곧 육체로 의롭게 되려고 하고 육신의 것을 구하는 신앙을 자랑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도를 외면하는 사람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십자가의 핍박을 받은 사람 즉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섭리에 순종한 사람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악귀를 좇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고 몸에 지니고 있으면 육신의 일이 잘되기 때문도 아니다. 육신으로 존재하는 사람이 자신이 인식하는 존재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 십자가에 있고, 십자가를 통해서 알게 되기에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늘날 신앙인들이 교회에 다니기에 육신의 일이 잘된다고 믿는 것과 그런 믿음을 인하여 육신의 일이 형통하므로 다른 사람에게 그 가치관을 전도라는 이름으로 전하는 일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할례를 자랑하는 일에 불과하다. 당연히 십자가의 핍박을 회피한 것이며 구원의 섭리를 외면한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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