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5:16-26)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8. 28. 12:50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은 공존할 수 없다고 분명히 선언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보는 신앙인들의 모습, 성령으로 거듭났기에 자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바울 사도가 육체의 일로 열거한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또 회개하는 삶은 공존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부분 신앙인에게 이것은 요원하거나 그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게 하는 말씀으로 보일 것이다. 그것은 육체의 일을 보는 관점이 사람과 다른 것에서부터 시작된 어두움이다.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의로움은 일반적 사람 사회에서 말하는 의(혹은 정의)와는 다르다. ()’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의로움의 기준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이므로 모든 정의와 의의 기준이 하나님의 생각인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완전하게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던 모든 개념과 의로움과 정의(define)는 언제나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 조정해야 한다. 특히 죄가 그렇다. 바울 사도가 육체의 일로 규정한 간음, 우상숭배, 도적질 등도 하나님의 기준으로 봐야 한다. 바울 사도가 여러 가지를 열거하고 있는데, 우리가 당연히 악한 것이라 여기는 이 항목들도 사람이 가진 법률이나 도덕적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의와 정체성을 기준으로 이것을 다시 봐야 한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간음과 우상숭배를 세부적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간음이라고 하면 결혼한 배우자가 아닌 이성과의 관계나 창녀와 같은 이들과의 관계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간음하는 사람이라고 보시는 사람들의 행위 중 일부 드러난 것일 뿐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음의 본질이 아니다. 또 조각한 불상이나 기이한 나무나 바위에 절하는 게 우상숭배의 본질이 아니다. 조각한 나무나 돌에 절하고 섬기는 것 역시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의 생각이 드러난 것일 뿐이다.

 

간음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자기 짝이 아닌 것과 상관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성적인 문제를 말씀하시는 게 아니다. 근원적인 간음은 사람이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 아닌 다른 것을 자기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성적으로 아무리 순결해도 존재 자체가 간음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삶의 주신 목적, 십자가로 표현된 그 목적이 자기 인생의 목적이 아닌 모든 사람은 사회적 도덕성이나, 종교적 거룩함이 어떠해도 하나님 앞에 간음 중인 사람이다.

 

우상숭배도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가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당신조차도 어떤 형태로 조각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상이나 석상을 만들지 않으면 우상을 조각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목상이나 석상에 절하지 않으면 숭배하지 않는다 생각한다. 하지만 우상을 조각하는 것은 단지 물리적인 조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리적 조각보다 개념적 조각이 더 중요한 쟁점이다.

 

하나님을 자기 생각대로 정의하는 것 역시 우상을 조각한 것이다. 하나님이 가지신 고유한 정체성대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신의 개념에 하나님을 넣고 만드는 게 우상을 조각하는 것이고,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을 조각하는 이유는 자기가 원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것은 육신의 정욕이나 욕심이라고 말씀하신다. 즉 육신의 평안과 복락을 소망하니 하나님은 사람의 어떠함에 따라 육신의 삶에 복이나 벌을 주신다 믿는다. 하나님을 행위와 소유를 드리면 의롭게 여기고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으로 믿는 것이 하나님을 우상으로 조각하고 섬기는 것이다.

 

이같이 바울 사도가 열거한 육체의 일은 사람들이 가진 일반적인 악행과 다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간음, 우상숭배 등의 개념을 재정립하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 삶에 하나님이 보시는 육체의 일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 성령이 인도하면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하심이 이 뜻이다. 사람이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것이고,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것은 육체의 일들을 행하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사람들이 정의한 육체의 일의 범주보다 더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육체의 일이 없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육체의 일이 전혀 없는 사람이어야 성령에 속한 사람이고, 성령에 속했다는 것은 성령으로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니 이 생명이 가진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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