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3:23-29) 율법 아래 있을 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7. 8. 17:52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믿음이 오기 전은 율법 아래 매여 있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한 마디로 구원을 받기 전은 율법 아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말씀도 의미가 있으려면 믿음이 온 사람, 즉 자신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율법 아래 있는지 분간조차 하지 못한다. 믿음이 온 사람은 분명히 율법의 인도함이 있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을 꼭 분간할 수 있어야 하는가?’라는 의문과 반문을 자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앞서 구원을 받았다면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을 만났을 것이라는 논리처럼,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면 믿음 안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알기 어렵다. 이것은 논리적 논쟁이 아니라 오늘날 신앙인들의 모습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 신앙인은 사실상 율법 아래 있다. 물론 자신들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구원은 쉬운 것이란 말씀에만 매몰되어 확실한 증거도 없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경향이 짙다. 율법과 믿음이라는 주제 역시 그렇다. 구원을 받았다면 분명히 율법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율법적인 가치관과 삶을 청산했다는 의미다. 즉 행함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음을 알고 살아간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안전을 보장하신다고 여기는 것과 같이 어떤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와 보살핌을 보장받으려 한다. 그것은 분명히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임에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율법 아래 있지만 믿음 안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고, 율법을 만났지만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율법은 몽학선생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한다. 몽학선생은 학생을 혹독하게 몰아서 교육하는 스파르타식 교수법을 가진 선생이라 할 수 있다. 율법이 우리가 죄를 깨닫도록 얼마나 엄격하게 다루는지를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지키다 하나를 범하면 모든 것을 지키지 않은 것과 같다는 것은 더 이상의 엄격함이 없을 정도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그런 혹독한 세월이다.

 

누구라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교회가, 또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했었다면 그 엄격함을 알 것이다. 그리고 그 엄격함 앞에 타협하지 않았다면 크나큰 낙심을 할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이렇게 노력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수시로 회개해도 또 죄를 범하는 자신을 용납하고 타협하는 것에 분명한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 율법 아래의 삶은 그렇다. 적어도 하나님을 바로 알고, 정말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려는 진실한 마음이 있다면 그렇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행위로 지켜내려고 하면 반드시 절망하게 된다. 이것은 중력의 법칙처럼 예외가 없다. 율법 아래 있을 때는 그렇다. 이런 세월과 간증이 없다면 율법을 벗어난 것 아니다. 성경을 육체로 지켜내려고 노력하다가 절망을 만난 적 없이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도 없고, 율법이 의도하는 대로 율법을 떠나 약속을 좇아 지시할 땅으로 갈 동력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은 그렇게 우리를 믿음으로 이끈다. 행여 기도하지 않고 운전하면 사고날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신앙은 어느 순간 정말로 기도하지 않거나 아니면 기도했음에도 사고가 난다면 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라며 기도했던 모든 것이 수포가 된다. 그러면 기도한다고 사고가 안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듯이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라면서 성경을 행동으로 지키고 그 공로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살아도 인생은 언제라도 원치 않는 길로 접어들게 되면 육체로 성경을 지키는 공로로 하나님의 의를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적어도 율법은 분명히 그렇게 이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인도함을 대체로 거부한다. 금식기도를 시도하다 실패하면 자신을 자책한다. 그리고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육체로 성경을 지키고, 육체의 공로를 드려서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사는 것이 실패하면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라 받아들인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의도보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아 사망에 이르는 법이 그것이다.

 

율법 혹은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은 행하지 않으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까 염려하므로 억지로 또는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다. 더욱이 원하는 결과가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서라도 세상에서 높아지고 이기는 자가 되려는 것이라면 더더욱 문제다. 그때는 육체로 성경을 지키게 하는 동력이 율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것을 육신의 정욕이라고 말한다. 정말로 율법을 인하여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죄를 깨닫게 하고 믿음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신앙적 불행이 아니다. 정말로 온전한 율법 아래 있다면 분명히 죄를 깨닫고 믿음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예외 없이 믿음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따라서 범법자를 인하여 주신 율법 역시 당연히 그렇다. 또한 실수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므로 사람이 제대로 율법 아래 있다면 반드시 믿음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며 그 믿음을 인하여 죄를 고백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 회칠한 자기 욕심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지키는 것은 온전히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율법 아래 있다면 반드시 믿음으로 이끄심을 받는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바로 그런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율법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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