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나는 율법을 완성하러 왔노라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18. 14:58 Writer : 김홍덕

우리는 앞에서 <심청전>의 이야기를 잠깐 했습니다. 심청전의 주제는 <효(孝)>입니다. 효를 이야기하기 위해 심청이는 바다에 몸을 던집니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이 심청전을 오늘날의 인권적인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인신매매입니다. 하지만 시대적 상황이나 심청전이 소설이라는 점을 고려한다고 해도 그것을 문제시 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심청전을 학교에서 배우고 읽은 사람들에게 심청이는 효도를 한 딸이지 인신매매의 희생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심청전을 읽고서 ‘효도를 하려면 바다에 몸을 던져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효도의 내용이 심청이와 마찬가지로 부모님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라도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심청전을 읽으면 그 전하고자 하는 의미인 <효>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심청전의 본질은 아버지가 눈을 뜨려면 딸이 바다에 빠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효도하라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심청전을 읽고 효도하기 위해서 문자 그대로 바다에 빠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율법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율법, 십계명과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들은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율법과 계명은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청전이 효도를 이야기한 것처럼.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도 그렇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기록된 문자와 문장대로 육신이 행할 때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자기 안에서 자기 삶으로 표현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경을 지키는 것입니다. 심청전을 읽고 효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 자기 부모님을 잘 공경하는 것이 심청전이 자기 것이 되는 것과 같이.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대하면서 문자 그대로 행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잘 하느냐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의로운지를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도승이나 신부나 수녀와 같이 사는 것이 주님의 종으로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몸을 제어하고 또 삶을 오로지 종교적인 의식 안에만 두는 것이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과 삶이 자기 삶에서 많아질수록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또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디까지가 종교와 신앙의 세계이고 어디까지가 육신의 삶일까요? 그게 구분이 가능할까요? 그렇다고 그것이 구분되지 않으니 그렇게 사는 것은 의로운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오심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이 제사장으로 오셨다고 했다면 분명히 신부나 수녀나 목사나 수도승과 같은 사람이 좋은 신앙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그것이 육신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즉 육신의 삶은 어떤 경계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육신의 삶과 신앙의 삶을 분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삶, 그것 전부가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이셨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의 어떤 부분이라도 그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킴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고 또 그것이 말씀을 따라 혹은 지키는 것이라고 산다고 여기는 것은 어두운 신앙입니다. 심청전을 읽고 주제가 효도가 아니라 바다에 빠지는 것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율법과 성경의 말씀을 몸으로 지켜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 사도는 로마서 3장에서 새로운 법, 곧 믿음의 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율법 즉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면 분명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는 분명하고 또 아주 쉬운 법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니.


여기서 우리는 어쩌면 다 아는 뻔한 답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생각과 같이 뻔한 답이 아닙니다.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문자 그대로 몸으로 지켜내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율법을 지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새 법이 되시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인함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서 문자 그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의 방향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성경을 지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목숨과 같이 지키는 유대인들이 볼 때 어이없는 행동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물론이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의 상을 엎어 버리고, 성전을 헐면 삼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는 등 율법을 작정하고 어기려한 사람과 같은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한술 더 떠서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마 5:17)


그럼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은 율법을 잘 지키시지도 않으셨는데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시고 또 율법의 일점일획도 빠짐없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마 5:18) 말씀하신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율법이 의도한바 목적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율법의 완성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 예수님께서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이라고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모두 율법을 완성시키고 다 지킨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니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하고, 또 육신이 연약해서 잘 지키지 못하니 오늘도 내일도 어제처럼 계속 노력해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의 신앙이 온전한 신앙입니까? 그런 신앙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다 이루신 분이고, 그분을 믿고 그분이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이 곧 나의 정체성이고 나의 모습과 삶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율법이 다 완성된 상태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 율법을 또 성경을 지키고 따르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면 아직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완성되었는데 노력할리는 없는 것이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이시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괜히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 같은 정체성을 가진 생명이 되기를 바라셔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고 사람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자기 삶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율법의 완성일까요?


우리는 앞에서 심청전 이야기를 했습니다. 심청전을 읽고 부모님을 위해 바다에 빠진 사람과 심청전을 알지 못해도 부모님을 잘 공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심청전을 완성한 사람이겠습니까? 그건 아주 명확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볼 때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의도는 외면하고 성경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이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의 목적이 바로 예수님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성경은 행동강령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 그와는 색다르게 행동은 무관하게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만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삶이 된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것을 위하여 만들어 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의 답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길을 찾는다는 것이 인생에서 잘 살고 부자로 또 건강하게 사는 조건에 대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려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은 인생 그 자체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또 그것이 해를 당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하고, 경건하려 애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이 우리 행동에 반응하시고 그 결과 복을 주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모든 성경을 행위로 지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아닙니다. 누가 차에 기름을 넣어주기 위해서 차를 사겠습니까? 하나님도 사람의 육신이 먹고 입는 것을 풍족하도록 하실 목적으로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차를 사는 것은 기름을 넣어주기 위함이 아니라 차를 통하여 나의 의도(이동)를 이루기 위함이듯,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도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의도대로 삶으로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하는 인생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행동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먼저 있어 그것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표현이 어떤 것인지를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제조법이나 그리스도가 되는 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설명,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설명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또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인생의 정체성이고 삶의 이유와 목적임을 아는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의가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본성이 표현되어 행동하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하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무엇 무엇을 하라는 말씀의 본질적인 의미는 그런 행동을 하는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마치 심청전은 효도할 마음이 있으면 바다에도 빠질 수 있다는 것이지 바다에 빠지는 것이 효도라고 말하고자 함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의가 있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운명과 정체성이 자기 삶의 운명과 정체성이 된 사람의 삶이 어떻겠습니까? 그 사람의 삶은 이러나저러나 또 사나 죽으나 그 삶의 모양이 어떠해도 늘 율법과 복음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고양이가 배타고 바다에 간다고 상어가 되지 않듯, 마음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 사람의 삶은 삶 전체가 온전히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이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율법과 모든 계명이 이루어진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도 율법을 완성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있어 율법으로 표현되는 행함이 삶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당연히 율법을 완성한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주제별 성경 보기 > 율법과 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8. 십자가의 도  (0) 2016.10.27
7. 다 이루었다.  (0) 2016.10.25
5.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0) 2016.10.17
4. 돌로 떡을 만들어라.  (0) 2016.10.16
3. 선악과와 무화과  (0) 2016.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