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17. 09:46 Writer : 김홍덕

많은 사람들은 율법이란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복음으로 대치된 것과 같이 생각합니다. 율법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죄를 알게 되었는데 그 죄를 예수님께서 대속하셨으니 이제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속 곧 복음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은연중에 ‘율법은 이제 적용되지 않고 폐기된 하나님의 법’이라는 인상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율법은 온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온전하지 않다면 율법을 주신 하나님도 온전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과 사도들은 율법에 대하여 ‘지나간 법’으로 여기거나 터부시해야할 것으로 여길만한 말씀들을 하셨는가가 궁금해집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것은 율법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율법에 대하여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율법은 온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온전하다는 것 외에도,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것을 인함입니다. 그런 율법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하듯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리고 사도들이 율법을 오해한 율법주의자들에 대하여 책망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 곧 율법을 오해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마치 생명의 본성이 그 생명이 살아가는 모양과 삶의 형태를 정한 법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유전자는 그 유전자의 법이 있습니다. 그 법에 의하면 사람은 날아다닐 수 없고, 물속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반대로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직립보행을 하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다 생명의 법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고 물에 빠지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래서 행여 사람이 물속에서 견디는 수영을 하게 될 때는 ‘수영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 날게 된다면 그 역시도 ‘나는 법’이 될 것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이란 언뜻 보기에 다 ‘이렇게 해라’라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율법을 주실 때는 분명히 그 앞에 <누가> 그렇게 하여야 하는지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예로 들면 출애굽기 20장을 시작하실 때에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건져낸 여호와라”고 선언을 하신 다음에 다시 모든 계명 앞에 <너>는 이것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이렇게 하라고 하신 것은 어떤 존재가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먼저 그 율법을 행할 존재가 정립되고서 그 존재가 어떤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행동을 하면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 먼저고 그 존재는 이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그 존재의 본성은 이런 행동을 할 것이니 너는 그런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뜻입니다.


특히나 하나님은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이는 모든 생명의 주관자시라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생명의 법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계명도 생명의 하나님의 본성에 따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생명으로 나면 그 생명의 본성대로 행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생명이 되면 율법은 지켜질 것이니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의 본질은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이 죽자는 뜻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말이듯, ‘무엇 무엇을 하라’는 율법과 계명도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지금 이 시대의 기독교인(성경을 경전으로 하는 대부분의 종교)이나 율법과 성경의 본질적인 방향성과는 반대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율법도 분명히 <너>라는 정체성이 정립되고 난 다음에 그 <너>가 생명으로서 어떤 행동을 하여야 한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율법과 계명과 성경말씀대로 행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역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율법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는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율법은 비유컨대 생명이 가진 본성과 행동의 모습입니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너는 물속에서 살찌어다.’라고 하셨다는 것은 너는 물고기라는 본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 본성대로 정체성의 자리를 지키고 살라는 것입니다. 율법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의가 있는 사람의 삶이 율법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물속에서 생활하면 물고기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어이없는 짓을 하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행동이 부족할까 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본성마저 극복하여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자기 마음에 있는 본성은 감추고 겉으로는 고상하게, 또 열심히 성경을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양은 번듯하나 생명이 없고 죽음만 있다는 것입니다. 선덕여왕이 당태종이 보낸 모란 꽃 그림이 화려했지만 향기가 없다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은 율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반대로 보는 관점을 가지고서는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반대로 생각하니 당연히 의롭지 않기도 하지만, 하나님과는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존재로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닌데 하나님과 다른 생각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수행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에 대한 의를 알지 못하고 반대로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관점과 가치관과 믿음과 신앙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왼나사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이나 계명뿐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라도 그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법을 좇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육신의 행동이 따라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엉뚱한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그릇과 같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으로 잉태되어 그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 생명의 법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 삶의 모습과 모양과 행함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행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 것은 율법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율법이나 계명이나 또한 예수님의 말씀이라도 그것을 읽고 듣고서 ‘어떤 존재가 되어야 저란 삶을 사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심청전을 읽고 효도를 하면 되는 것이지 바다에 빠지는 것이 심청전의 교훈을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부모가 자식을 잃는 불효가 되지 않겠습니까?


행함과 행동은 어디까지나 생명이 있는 존재의 생명본성의 증거입니다. 생명이 없는데 행동을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십계명을 지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의 가치관에서 건져내신 신으로 믿음으로 하나님과 <너와 나>의 관계가 된 사람은 십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또한 그와 같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읽고 그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이신 십자가의 삶이 자기 안에 씨와 같이 심기고 그것이 성령으로 인하여 생명이 되고 그 생명으로 삶이 거듭남으로 자기의 모든 삶이 그 생명으로 표현이 되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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