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돌로 떡을 만들어라.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16. 22:25 Writer : 김홍덕

‘율법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표면적 대답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라고 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십계명과 레위기에 나오는 계명들과 같은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신앙의 어떤 부분에서 율법이라는 것은 뭔가 떨쳐내어야 하는 과거의 유산과 같이 여겨지는 것은 율법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율법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 하나님께서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율법에 매몰된 마음에 대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율법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 우리에게 율법을 터부시 한 것으로 비치는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진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대한 말씀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 당시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한 유대인들에게 한 사도들의 말씀이 오늘도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하게 지금 이 시대가 달력의 시간, 곧 객관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볼 때 사도들이 율법주의자들을 경계하던 시대에서 2,000년 이상의 간격이 있고, 또 하나님의 율법에 의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율법이나 예수님의 말씀이나 그것이 가진 정체성을 가지고 율법이 무엇이고 복음이 무엇이냐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율법이나 복음이나 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하신 말씀이고 단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성경의 어떤 부분을 율법이라 하고 어느 부분을 복음이라 하느냐가 아니라 성경을 보고서 행동으로 지켜서 의에 이르려고 한다면 신약성경도 율법이 되고 반대로 구약성경의 말씀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의가 행동이 아니라 그 의가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어 본성으로 표현되다보니 행동으로 나타난다면 십계명도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말씀이 구약시대에 말씀하셨다고 오늘 나에게 복음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전부가 복음은 아니라는 것이거나, 사람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려서 어떤 것은 율법으로 어떤 것은 복음으로 받는 상관 노릇을 한다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율법이 무엇인가?> 할 때 율법의 정의를 묻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왠지 모르게 떨쳐야 할 것으로 이야기 되는 율법은 무엇인가 한다면 그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성경을 읽고 또 듣고서 그것을 문자 그대로 행동으로 지켜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이것을 구분하기 위하여 간혹 ‘율법주의’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행위로 지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인가?’를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앞에서도 계속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 시대의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잘못 믿는 결정적인 편견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금식 후에 시험을 받으신 부분을 한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실 대에 금식하셨는데 금식하신 예수님을 마귀가 데리고 가서 시험을 하였고 예수님께서 그 시험에 대하여 답하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생의 정체성을 보여주려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니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우리 모두가 받는 시험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보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첫 시험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그것은 <돌로 떡을 만들어라>는 것이었습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은 배고프니 돌이라도 먹을 것으로 만들라는 유혹이 아닙니다. 배고파서 마귀의 말을 들으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다는 식의 논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돌은 율법입니다. 이는 모세가 계명을 돌판에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돌로 쳐 죽인다’는 사형 집행법은 다른 말로 율법에 의거하여 사형을 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성경 곳곳에서 돌은 율법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어서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는다는 것은 그 먹은 것과 우리 몸이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그것이 내 정체성과 삶의 일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은 율법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 곧 지킬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진 정체성의 배고픔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 정체성의 배고픔은 바로 인생의 목적과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왜 사는지?>에 대한 답은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지키면 알 수 있는 것임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돌로 떡을 만들라는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 모든 사람이 율법을 행동으로 지켜내면 하나님의 의에 이르고 인생의 목적과 삶의 공허함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마귀는 시험을 할 때 조건을 달았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단서를 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육신의 행동으로 지켜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고 유혹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답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으로 답하셨습니다.(마 4:4) 이것은 사람은 밥을 먹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만 들으면 산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았다고 하는 것, 생명도 살았고, 그 삶도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삶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설명을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고 나타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육신을 몸으로 잘 지켜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행동으로 속을 바꿀 수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방향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었더니 하나님께서 그 삶을 살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겉에서 속으로 향하는 방향을 가지고 있고, 예수님의 정체성은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생명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율법과 복음을 이야기함에 있어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 돌로 떡을 만들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유혹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몸이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육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켜 행하여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유혹을 지금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객관적 시간이 예수님이 오신 다음 세대를 살고 있기에 복음의 시대를 산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볼까요?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 되려면 주일날 예배를 위하여 토요일에 일찍 자고, 말도 경건하게 하고, 주일날도 일찍 나와서 앞에 앉아야 한다.(have to do)’라고 하는 것이 경건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이 말은 행동을 경건하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행동을 경건하게 해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사람의 삶이 경건해 지는 것입니다. 돌로 떡을 만드는 것, 육신으로 율법을 지켜내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이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경계한 유대인들의 누룩, 사도들이 경계한 율법주의(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그리고 오늘날 성경(신약성경의 예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을 읽고 문자 그대로 육신으로 지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두 예수님께서 받으신 마귀의 첫 번째 시험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경계한 것이 이것입니다.


율법은 부정한 것이나 터부시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보는 사람의 관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율법은 행동으로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잘 지켜야 하나님의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의에 이르지 못합니다. 나사를 거꾸로 끼우는 것과 같은데 될 리가 없습니다. 사람이 돌을 먹을 수 없듯이 사람은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게 되면 모든 율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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