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선악과와 무화과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14. 17:18 Writer : 김홍덕

바로 앞글에서 ‘이것이 옳은 것이야! 그러므로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하는 것이 율법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작점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하고 의아한 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 문제며, 더욱이 그것이 율법과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과 어떤 상관이 있는가 싶기 때문입니다.


사실 표면적으로 율법이 무엇인가를 따진다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십계명과 레위기를 비롯한 구약성경에서 명시한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여기면 간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단순하게 시키는 것만 하는 것을 바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율법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 율법으로 정의된 사람의 행위 양식은 사람 안에 그런 행동 양식을 이끌어내는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과 의도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정체성으로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의)이 육신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표현된 행위의 모습이지 행위가 속사람을 바꾸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도하심과는 다르게, 다른 방향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했을까요? 여기가 바로 율법이 무엇인지를 풀어가는 입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곧 사람을 만드신 소회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엿새 동안 천지만물을 지으시는 과정에서 보시기에 좋았다고는 하셨지만 유일하게 사람을 만드시고는 심히 좋았다고 하셨고, 무엇보다 사람을 만드시고는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목적이 사람을 지으심으로 달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에 대하여 다시 말씀하시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으로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만물로 그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표현하고자 하심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사람은 그 모든 만물이 창조된 목적이 수렴되는 집결체이자 모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사람의 육신으로 오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 지으신 창조물의 최종적인 목적물이 다른 것이었다면 다른 것으로 이 땅에 오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이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신 목적에 너무나 온전하고 완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무한히도 자신이 부족하다 여기며, 수도승과 같이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더 온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본성 안에 성욕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식욕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건만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겠다고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 안에 있는 본성을 제어하려 하고 그렇게 할 때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관점의 차이가 바로 율법을 행위로 지켜내려는 접근을 가져온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기 위하여 어떤 것을 도입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람이 부족한 무엇인가를 메우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너무 연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바로 선악과의 사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람(아담의 뜻이 사람임)은 본디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에 속아서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리고서 일어난 일은 사실 마귀의 말 대로 죽는 것이 아니라 눈이 밝아지는 일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 밝아진 눈은 무엇을 보게 하였는가 하면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보니 벗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 것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선악과에 대한 말씀은 그 하나만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율법과 복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관점에서 본다면, 사람이 눈이 밝아져서 보니 자신이 부끄러워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어 숨었다는 것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이 부끄러움은 아내 하와 앞에서 벗어서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그 밝아진 눈의 기준으로 사람을 보니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자신이 규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눈이 밝다진 것은 오직 선악과를 먹은 것으로 인함입니다. 선과 악이 사람 안에 들어와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악한 것만 먹은 것이 아닙니다. 선한 것도 같이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인 선한지 무엇이 악한지에 대한 기준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원래 그런 판단은 하나님만의 것인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 하나님만이 가지실 수 있는 기준입니다.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에 제작을 의뢰하면 그 제품의 합부 판정 기준은 주문을 낸 대기업이 가지고 있습니다. 중소기업에서 그것을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보고 사람이 어떻게 하면 선하고, 어떻게 하면 악하다고 판단을 하는 것은 중소기업이 자기가 만들었다고 설계한 대기업의 의사와 무관하게 자기가 합부를 판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도 사람의 일과 세상의 일에 대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 선하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의 본분이고, 사람이 불의를 보고서 참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그것이 삶의 목적인양 살고, 무엇보다 삶의 모든 순간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참지 말아야 할 불의는 오직 하나님의 지으신 사람을 스스로 판단하고 있는 그 불의함 하나 밖에 없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삽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일단 사람이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으니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이래야>한다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것이 양심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법이라고 하며, 어떤 이들은 능력이라고 합니다. 능력이 있어야 세상을 잘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준을 도입하거나 만듭니다. 그리고 더 높은 기준을 찾는데 그러다보니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기준으로 하면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으니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 고상한 것 같지만 그 출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만드시고 기뻐하신 그 사람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부정함을 바로 잡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사람의 부정함을 가리기 위하여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렸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무화과는 이스라엘의 나무, 곧 율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스스로의 기준으로 사람을 부정하게 여기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의와는 다르게 거꾸로 지켜내려고 하는 생각으로 율법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대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삶을 살면 그냥 다 표현되는 행동 양식인데 그것을 거꾸로 지키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은 그 자체가 문제 아니라 율법을 대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이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려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의 모습 그대로의 정체성을 회복하여 스스로 사람과 세상을 판단하여 어떤 것은 선한 것으로 어떤 것은 악한 것으로 판단하여 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자신을 통하여 표현되는 것에 자기 인생의 목적이 있다는 것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이루기에 너무 만족한 상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 지으신 목적,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삶이 자연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그 본성을 표현하듯이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품성이 표현되는 아들이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즉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삶이고, 율법을 완성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사람이 율법을 행동으로 지키려는 것이 합당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라고 하니 먼 이야기 같지만, 신약 성경을 읽고도 사람들을 그것을 몸으로 지키려고 합니다. 구약 성경의 것은 율법이라 하지만 십일조는 지키고 삼겹살은 먹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앞뒤가 맞지 않지만 모든 것을 다 자기 기준으로 해석합니다. 그도 그럴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도 자기 안에서 스스로의 생각으로 만든 기준들이니 그 습성과 궤를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율법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한 유대인들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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