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6장, 막 14장, 눅 22장/마 26장, 막 14장, 눅 22장, 요 13장)


가룟 유다는 12제자 중의 한 사람이지만 성경에 많이 나오는 인물은 아니어서 일반화하기 힘들지는 모르지만 그가 예수님을 “주(主)”라고 부른 적은 없다. 그는 배신의 아이콘인 것은 맞지만 다른 제자라고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배신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잡혀가자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저주를 받은 반면 다른 제자들은 모두 사도가 되어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고 그 은혜로 오늘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묵상하여 우리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대하는 차이로 인한 것이다. 가룟 유다는 자신이 정한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다. 반면에 다른 제자들은 자신들이 조각한 그리스도를 버리고 예수님이 보이신 그리스도를 온전한 그리스도로 순종했다. 그 과정에서 절대적인 것이 두 가지 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이 조각한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았고, 나머지 11제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기준으로 왜 자신이 아는 그리스도와 예수님의 모습이 다른지를 알고자 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차이가 바로 성령강림이다.


향유 옥합 사건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다는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가장 빨리 알았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자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던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는 가난도 해결해야 하는 그리스도다. 그러나 가난이 항상 있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는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말씀이라는 의미를 가룟 유다는 제대로 인지한 사람이다.


가룟 유다는 당연히 예수님은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라고 생각한 사람이고 무엇보다 자기 생각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다.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데 예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고, 그 판단대로 예수님을 팔아 버렸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 들린 자를 회복시키는 능력과, 성경을 전하는 권세 있는 모습과 그리고 백성들 눈에는 로마나 비슷하게 보이는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등을 압도하는 예수님은 분명히 가룟 유다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 그리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환호한 사람들의 그리스도였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는 예수, 가난을 해결하는 것이 직임이 아니라는 예수는 그리스도는커녕 한낱 종과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그래서 종의 몸값 정도에 예수님을 팔아 버렸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종의 몸값에 팔았다. 세상을 구원하지 않는 그리스도며 십자가로 가는 예수는 그에게 종과 다름없었다. 종이나 죄인은 어느 시대나 같은 개념의 존재들이다. 전쟁에서 패전국이 되면 종이 되었다. 십자가로 간다는 것은 죄인이 되는 것이니 당연히 종이나 노예와 같다. 세상의 가치로 경쟁하는 세계 안에서 경쟁에 패한 사람 역시 낮은 자리로 가는 것은 종에 불과하다. 그것이 가룟 유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오늘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이다. 사람들은 가룟 유다를 배신자라고 욕하고 배신의 대명사로 사용하지만 사실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은 인생의 목적을 가지신 이의 창조 목적을 늘 배신하는 존재다.


예수님에게 종의 몸값을 붙인 가룟 유다 그리고 그와 동일하게 그리스도를 정의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의 생각은 그 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사람들은 생각조차 못하고 살지만 사실 오늘날 예수님을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동일한 부류다.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기 필요를 구하는 사람은 모두 가룟 유다라는 말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말로는 거룩하게 예수님을 경배하나 실상은 자기 필요한 것 구해서 대주는 빵셔틀이나 진배없다. 자기 필요한 것을 달라고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을 부리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교회에 좀 다니다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안 되면 교회를 안 나오거나 세상의 문제를 잘 해결하는 교회를 찾아 떠나는 사람은 가룟 유다와 같이 예수님을 종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돈 달라, 밥 달라, 건강 달라 기도하는 사람, 세상에서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니 그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가룟 유다의 진정한 후손


가룟 유다와 구분되는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도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가룟 유다와 비슷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모두들 자신인가 생각했다는 것에서 모든 제자들이 십자가를 지러 간다는 예수님의 낯선 모습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 불안한 모습을 베드로가 보여준다.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은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네가 오늘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 13:37)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 13:38)


이와 같이 모든 제자들도 예수님을 배반했고, 무엇보다 변화산 이후부터 최후의 만찬에서 자신들이 지금 마주하고 있는 예수님은 자신들이 알고 기대했던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에 많이 당황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자신들이 생각한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은 가룟 유다나 베드로를 비롯한 11제자나 모두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러나 가룟 유다와 다른 제자들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예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다른 두 부류 중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았고, 11제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믿었지만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하여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다르다는 것에 매우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며 그 의로움으로 볼 때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심판했다. 그 생각이 가룟 유다로 하여금 예수님을 팔게 했고, 유대인들은 바라바 대신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확신했지만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몰랐지만,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자신들이 기대한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란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지금은 내가 가는 곳에 가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지금”은 가지 못하지만 성령이 오시면 갈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반면에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은 예수님 가시는 곳으로 오지 못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네가 행하고자 하는 것을 속히 행하라고 하시고,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기준을 자기 생각에 두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에 두는지는 극과 극의 결과를 낳는다. 누구나 그리스도를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로 여기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생각이 예수님이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 십자가로 가신 예수님의 모습과 상충된다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에는 성령이 오실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늘 못 박는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삶이 되고,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되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아주 낯설게, 버리고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낯설게 다가 올 수밖에 없다. 회개하고 죄를 고백하려면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수인데 하나님과 자신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낯설음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낯설지 않다는 것은 분명히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세상의 가치로 귀한 것을 구하는 신앙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신앙은 가치가 전혀 바뀌지 않은, 그러니까 거듭나지 않은 신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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