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제사장의 본질적 개념이라는 의미다. 예수님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듯 멜기세덱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가진 본질적 의미와 그 제사장의 직분이 육신이 된 존재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자기 육신의 희생을 드린다는 의미다. 그것은 육신을 번제로 제단에서 태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육신을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는 것에 순종한다는 의미다. 그것이 제사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유명한 말씀은 한 순간 순종을 강조하기 위해서 있는 말씀도 아니고, 육신의 노력이 전부인 신학을 전공한 사람에게 순종하라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말씀은 더더욱 아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은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것과 같은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도 분명히 여러 성경에서 제사라고 하고 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지신 십자가라는 제사는 예수님의 순종이 본질이고 그것이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제사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을 사람이 수용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성경 히브리서는 7장에서 멜기세덱을 “살렘 왕”이라고 한다. 살렘은 예루살렘의 옛이름이고, 예루살렘은 “평화의 땅, 성읍”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땅이 평안하다는 것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짐에 있어 저항이나 문제가 없다는 의미다. 멜기세덱이 살렘 왕이라는 것은 땅이 온전히 순종하는 것의 표상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제사라는 것이, 멜기세덱은 그 제사의 대제사장이고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시듯 그 제사가 육신으로 대변되는 존재라는 의미다.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맬기세댁의 반차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십자가의 순종의 제사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며, 그 제사의 본질적 의미를 대변하는 직분이 대제사장이며, 그 대제사장의 상징이 멜기세덱이기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그 본질적 제사를 십자가로 온전케 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대제사장이시니 녹색사과나 빨간사과나 모두 사과 안에 있듯 하나님의 제사를 몸소 순종하신 예수님과 그 제사를 대변하는 사람인 멜기세덱은 같은 반차에 속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멜기세덱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것에 집중하는 것은 손가락으로 저기를 보라고 할 때 손가락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지금 히브리서의 말씀은 멜기세덱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시고자 하심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으로 대변되는 하나님의 제사를 우리를 위하여 드리심으로 우리가 불순종하는 자리에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모습을 보고 순종의 자리로 들어가게 하셨다는 말씀을 하고자 함이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보고서 그 십자가가 순종으로 드린 본질적인 제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의미다.


믿음 역시 수동적인 것이다. 아들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들이 내 뜻대로 할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역시 그렇다.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과 그 결과를 추진하는 자신을 도와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이 자신을 주관하도록 자신을 드리는 것이 믿음이고 제사며 순종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제사가 그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놋뱀이 들리듯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모습과 다른 자신의 삶과 모습이 뱀과 같은 죄인이라는 고백과 그 반대에 서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움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을 주관히신 것임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삶을 하나님께 드림이 자기 존재의 목적임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그 제사가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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