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는 성령에 참예하고서 타락하는 것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타락한다고 예수님께서 다시 십자가에 실제로 못 박히시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수치를 당하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와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그 정체성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그 정체성과 다르게 대하는 것을 수치라고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도 자기 신분에 맞지 않는 대접을 받으면 불쾌하게 여긴다. 이는 성령에 참예하고서 그것을 버리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정확히는 훼손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시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의 본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지으신 이의 아들이니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그와 반대로 가장 낮고 천한 자리인 사형수의 자리로 끌려가신 것이 바로 십자가다. 그리고 그렇게 옳지 않은 의를 주장하는 주장 앞에 육신을 내어 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며, 하나님 아들의 본성이라는 것을 드러나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육신을 가진,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이자 이유이고 우리 삶의 의미다.


사람들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산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그 사람들의 주장 앞에 자기 육신의 수고를 내어 준다. 그것은 그리스도라는 본성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아들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존재의 본질적인 정체성으로 보면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의 자리가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주장하는 자기들의 의에 끌려서 자기 자리가 아닌 곳으로 가신 것이 바로 십자가다.


십자가의 의미가 그렇다. 십자가에 다시 예수님을 못 박는다는 것은 다시 예수님을 예수님의 정체성과 다르게 대한다는 의미다. 그것이 바로 타락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본성에 이끌려 가장 낮은 자리로 끌려 가시므로 하나님께서 존귀케 하셨는데,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발견하고서 그 아들의 존귀함을 세상의 기준에 따라 높아지는 것이 타락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십자가에 달리심은 예수님의 정체성에는 반하지만 하나님의 의가 이끄는 본성에 따른 것이다. 그렇게 낮아져서 존귀하게 되셨는데 사람들이 존귀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면서 스스로 존귀하게 되는 것은 낮아지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이신 예수님을 정체성과 다르게 대접하는 것이다. 그것이 타락이다.


이것을 설명하는 히브리서 기자는 땅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땅이 하늘의 비를 받아서 채소를 내기도 하고 가시를 내기도 하는데 채소를 내면 복을 받고, 가시를 내면 불에 태워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채소는 사람이 먹는다. 채소는 자기 육신을 버린다. 그러나 가시는 사람에게 먹히지 않고 사람이 피한다. 자신을 보호한다. 채소는 자기 육신이 먹힘을 당하나 복이고, 가시는 자신이 살 동안 상하지 않으나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가 육신을 가진 인생에게 육신을 사람들이 옳다는 주장 앞에 내어 놓아 채소 같이 먹힘을 당하면 복이지만, 자신은 하나님의 의를 가졌기에 귀하고 대접받아야 한다면 자신을 귀하게 여기면 저주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것이고 타락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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