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3:1-6) 지으신 이의 생각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1. 5. 04:00 Writer : 김홍덕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감상에 젖거나, 아니면 육신의 정욕이 바라는 성취를 위해 육신이 바라는 일에 임하면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경건하게 또 예수님을 위해서 한다는 생각을 깊이 있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셔서 보이신 인생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우리를 떠나지 않는 철학인데 그것을 세상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찾는 그것이 바로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히브리서는 사람들의 집을 비유로 도입한다. 집은 내부에 거주하기 위하여 짖는 것이고, 당연히 내부에 거주할 사람이 있어 건축하는 것이다. 주인이 있다는 것이다. 집이 그렇듯 사람도 지으신 이가 있다는 것이다. 또 사람 역시 질그릇과 같은 존재이다. 그 안에 무엇이 거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은 외모에 의하여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속사람과 본성 그리고 유전자에 의하여 정체성이 결정되는 존재다.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육신으로 나타나므로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결정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거하시므로 그 육신의 삶이 속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며 창조하신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거하기 위하여 집을 지으면 그 집에 거하려는 사람이 주인이듯, 사람 역시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시기 위하여 지었으니 사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당연하게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의 말과 행동과 삶은 하나님께서 주인이심을 믿는 것과 거리가 멀다. 하나님께서 주인이라면 하나님께서 이 육신의 삶을 사용하실 때 온전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육신을 덜 움직이고 수고를 적게 하면서 더 많은 일을 이루어 낼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세상의 가치가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은 이기고 성공한 자의 모습이라고 여기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 반하는 것일 뿐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과 혼합한 것이고, 세상의 가치를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다.


어떤 분야든지 기본을 잘 지키는 것이 사실 모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또 세상을 만드시고, 그 전지전능하심으로 온전하게 세상을 경영하신다는 것을 정말로 온전히 믿는다면 사람이 할 것은 순종 외에는 없다.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세상을 경영하시는데 사람이 나설 일이 있을 리 만무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늘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고쳐 달라고 기도한다. 문제를 하나님께 의지하는 모습이라 신앙 같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세상을 고쳐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하여 무능하거나 무관심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순종 대신에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것은 육신을 소비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세상에 문제가 많다고 여기는 것은 육신이 편하지 않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육신을 소비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육신이 평안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데 세상의 형편이 그렇지 않으니 이것이 개선되어야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온전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종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쩌면 세상이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이들이 보기에 순종하기 힘들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 육신이 종이 되고 수고하여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의 방증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좋은 환경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은 사람들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를 바라심이다. 반면에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들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2장에서 말한 것과 같이 죽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세상이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은 바로 그렇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의로운 앞에 나를 내어 줄 때 드러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이셨다. 예수님의 구속이 바로 그것이라고 히브리서는 앞서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고 하면서, 이 세상을 지으신 주인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의 의를 깊이 생각하자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를.


그러면 어떤가?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는 자, 곧 육신의 정욕을 좇는 자들이 하나님께 세상을 고쳐 달라고 하는 일이 많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통하여 그 성품을 표현하실 일이 많은 세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신 뜻에 어긋남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세상은 자기 육신이 바라는 육신의 평안이 상실되더라도 예수를 깊이 생각하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두려움을 몸소 지시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뜻을 보이신 그 구속함으로 얻은 우리 정체성 대로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어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감사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언뜻 하나님께서 고의로 세상에 죄를 넘치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의를 가진 이들이 그 성품을 드러낼 터전으로 삼으신 것으로 들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두 가지를 모른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심이 육신으로 창조하신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 회복되는 과정이 진정한 창조라는 것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의로 충만하여 죄가 넘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상태가 흑암이 혼돈한 상태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창세기 1장도 열리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하나님의 의가 있어 사는 사람의 삶을 모른다. 그 감사함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당연한 것은 하나님의 의로 거듭나지 않았으니 창세기의 태초가 열리지 않은 것이고, 그런 관점으로 보니 세상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에 온전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의를 나타내시려 세상에 죄를 방치하시거나 더 나아가서 조성하시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세상의 주인이 어떤 의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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