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는 예수님과 형제가 된다는 것, 같은 생명을 가진다는 것은 사망의 세력을 이기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에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생명이라는 것은 육신의 목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들로 인정하시는 사람, 즉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 그 의가 육신의 삶으로 나타나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생명이라고 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다.


아울러 사망은 마귀에게 속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것은 그 자체가 마귀에 속한 것이라는 의미다. 육신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 마귀의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결을 달리하는 말씀이다. 이렇게 분명하게 하나님의 의가 없는 상태가 마귀에게 속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육신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마귀의 장난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은 성경을 무시하는 것이다. 


오히려 성경은 죽기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모두 마귀의 세력에 매인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죽기를 무서워하는 자를 구속하시겠다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구속하시는 대상이 누구인가? 바로 마귀에게 매인 사람이다. 죽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을 구속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죽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이고, 마귀에게 매인 사람이며, 하나님의 의가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죽음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는 앞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생명이 육신의 목숨이 아니라는 것에서 보듯 죽음도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죽음은 의의 충돌에서 자신의 의를 죽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네가 옳고 내가 죄인이라고 말하고 받아들이는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죽음이다. 그 속에 육신의 목숨을 잃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나의 옳음을 버리고 상대의 옳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정말로 상황에 따라서는 육신의 목숨도 내어 놓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이 그것이다.


성경은 육신의 목숨을 죽음의 본질이라 말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가 옳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목숨을 스스로 버리기도 한다. 그것은 보통의 일은 분명히 아니다. 다만 사람들의 그런 모습에서 사람에게는 육신의 목숨보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의가 죽는 것이 더 어렵고 힘든 문제라는 것이 증명된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죽음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죽음, 곧 자기가 옳다는 것을 버리거나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자기가 가진 의를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옳다는 것의 상징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선악과다. 어떤 것을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판단하려면 그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의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지 않았는데 의를 가진다는 것이다. 의는 존재의 목적에 관한 것이다. 부엌칼의 의로움은 음식을 만드는데 잘 사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엌칼을 음식 만들 때 사용하겠다는 목적은 부엌칼 스스로가 가지는 것이 아니다. 대장장이와 그것을 사는 주인에게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의다.


따라서 사람이 스스로 버리지도 못하고 빼앗기면 안된다는 의를 스스로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어이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분명하나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만들었더니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 만든 세상과 사람과 사람의 일을 판단하는 의를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목적 안에서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니 그것이 바로 마귀에게 사로잡힌 것이다. 결국 자기 의를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마귀에 속한 사람이요,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구속하시고자 하는 대상인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자신의 의를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이 가진 의가 세상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를 버린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쓸모 없는, 말 그대로 죽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를 따르지 않는 것이 세상에 속하였다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의 권세에 사로잡혔다고, 마귀에게 잡혔다고 하심도 사람이 세상의 가치 기준에서 온 자기 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버리는 것은 죽는 것이기에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죽임을 당하신 분이다. 어떤 모습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인지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의 임금이 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유대인들의 생각에, 가난한 자는 항상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유대인들이 가진 그들의 의 앞에 옥합 안에 갇혀 있던 향유가 옥합이 깨어지므로 향기로 드러나듯 예수님의 육신을 내어 주시니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하신 것이 십자가의 사건이다. 유대인들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의의 판단 앞에 자신을 내어 주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인 것이다. 히브리서가 말씀하고 있는 두려워하는 죽음 앞에 자신을 제물로 내어 놓으신 것이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더 이상 온전할 수 없는 분이다. 하나님 의의 본체이시고, 그 의가 육신이 되신 분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사람의 의 앞에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은 사람들이 자기가 옳다는 것을 버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구속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의를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가장 온전한 하나님의 의의 본체이심에도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내어 주셨는데, 자기가 옳다는 그 하찮은 것을 버리지 못하여 죽기를 두려워하는 인생들의 본이 되심이 구속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믿는 신앙은 내어 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악하나 하나님은 온전하시니 그 온전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말씀은 절대로 굽힐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사수하는 것이 온전한 믿음이고 큰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를 “1”도 모르는 어두움의 산물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죽음은 육신의 목숨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그것을 버리는 죽음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 히브리서의 의도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삶에서 사람들끼리 다투고 갈등하는 모든 것은 각자가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 주장에서 밀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것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서 밀리면 상대가 주장하는 의로움 대로 자신이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이 종이 되고, 때로 수고와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그것이 싫은 것이다. 아니 그렇게 사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인생들이 두려워하는 사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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