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에게 복종하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아들에게 복종하는 장차 올 세상은 예수님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라고 히브리서는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선 십자가를 언급하심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고난으로 말미암은 예수님의 삶, 장차 올 세상으로 이끈 그 고난인 십자가를 우리도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고난으로 우리를 장차 올 세상으로 인도하심과 같이 우리도 고난을 당하고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어떤 이들에게 장차 올 세상으로 인도하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 2:11)”

라는 말씀에서 확증된다. 예수님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복종하는 거룩한아들이 된 사람은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과 하나에서 난 형제라고 하심은 같은 생명의 본성을 가졌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좇아 지셨으니 그 십자가로 거룩함을 입어 예수님과 하나가 된 아들들 역시 같은 운명이라는 의미로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물론이고 모든 성경이 결국 모든 사람이 회복되어야 할 자리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설명하고 그것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를 말씀하신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그런 아들이 고난을 받음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영광과 존귀라고 말하는 것의 반대편에 있는 개념이다. 세상에서 영광을 얻는다고 하면 그것은 고난을 벗어났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란 천사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 속에 내포된 천사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알 수 있다. 천사들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세상이 말하는 영광을 얻는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세상이 고난을 벗은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반면에 예수님과 하나님의 아들은 고난으로 영광과 존귀를 얻는다고 하셨다. 아들이 되는 것은 천사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는 것은 결국 천사들에게 복종하는 신앙이라는 것이 세상의 가치를 추종한다는 것이다. 육신의 평안과 성공, 고난을 벗어난 자리에 이르기 위하여 그 추구하는 바를 성취할 능력을 가진 존재로서 천사를 인식하고 그에게 자기 소망을 의탁하는 것이 천사에게 복종하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장차 올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창세기에 말씀하신 태초가 열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인하여 자신 뿐 아니라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까지 영화롭고 존귀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육신이 소비되므로 영광스럽고 존귀한 존재가 된다고 여기시는 반면 사람들은 육신이 소비되지 않고 보존되고 평안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완전히 반대이다. 이러한 괴리를 해소하지 못한다면, 아니 그것이 자기 안에서 왜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시는지 모른다면 아직 고난에 대하여 세상이 가진 생각에 자신의 의를 남겨 두고 있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육신이란 세월을 살면서 점점 쇠약해진다. 일부러 고난이라는 것을 자청하거나 당하지 않아도 고난을 당한 것과 같이 되는 존재라는 의미다. 인생이 그렇게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은 그렇게 달성이 된다는 의미다. 약해지고 쇠약해지는 삶, 고난을 당한 것과 동일하게 소비되는 육신은 원래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을 있어서 안될 것으로 보거나, 반대로 그런 육신의 운명 속에서 그나마 원치 않는 것을 당하는 것이 죄로 인한 벌이라고 보는 것과 같은 안목은 모두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다른 생각인 것이다.


결국 날로 연약해지는 육신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고, 그 운명 안에서 맞이하는 날들 속에서 육신이 연약해지는 것을 어디에 사용할 것이냐가 핵심인 것이다. 육신이 소비되는 순리와 같이 세상의 가치에 매여 자신의 의가 옳다고 주장하는 인생들 앞에 육신의 종과 죄인과 같이 수고를 내어주는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그 육신의 운명을 거부하고 반대로 가고자 하는 노력에 수반된 곤고함을 고난이라 착각하면서 살 것인지의 문제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육신이란 세상의 가치를 좇는 자기 의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의가 육신의 삶이 된 하나님의 아들을 심판하는 심판 앞에 자기 육신을 내어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운명이라고, 세상이 모두 다 고난이라고 말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운명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볼 때는 한없이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피조물이 창조주의 뜻을 거스르면서 살아가려 투쟁하는 것에 비하면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평안임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리고 세상의 가치가 옳다고 주장하는 세상의 의 앞에 종으로 또 죄인으로 자신으로 내어주는 것은 육신의 평안과 안녕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는 신앙으로 볼 때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고난으로 보이겠지만, 피조물이 창조주의 뜻을 좇아 자신에게 주신 어차피 소비되는 육신을 하나님의 의와 뜻대로 소비하는 것은 가장 평안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피조물은 창조된 목적 안에 있을 때 가장 평안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동차 브레이크를 보면 항상 마찰을 일으키고 열이 나면 마찰로 인하여 닳아 없어지지만, 브레이크라는 제조 목적 안에서 보면 그것이 브레이크에게 가장 온전하고 평안한 것이다. 브레이크가 닳지도 않고 마찰도 일으키지 못한다면 버림을 당할 것이다. 그와 같이 육신도 나이 들면서 연약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육신이 그렇게 됨이 온전하다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도 당연히 육신의 삶을, 또 세상이 고난이라 말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과 같이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같은 안목을 가지지 못하여 다른 생각을 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로 사는 것은 육신의 고난만 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되어 살아 본 사람은 누구나 안다. 사람을 위하여 육신이 수고하는 것이 얼마나 평안하고 기쁨이 되는 것인지. 이것을 모르고 그리스도의 삶은 고난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 거듭난 생명이 아니거나 아직 어리다는 방증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나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자고 한 바울사도의 말은 다 거짓과 사기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고백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바로 그 이유가 우리 안에 본성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 고난만 당해야 하는가?” 와 같이 의문을 가진다면 예수를 믿는 자세가 잘못된 것이다. 내가 믿는 예수님의 말씀이 내게 의문이라면 나의 생각을 돌아봄이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블로그의 내용을 OFF-LINE에서 함께 나누실 분을 모집합니다.


모집 지역은 대구, 서울 입니다.


적정한 인원이 모이면 별도로 장소와 시간을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참여하실 분들은 아래로 연락주십시오.

e-Mail : elphis@kakao.com  /  phone : 010-3396-55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