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상세보기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동일성은 예수님이 우리와 다른 신성의 중요한 특성으로서 항상성과 영원함이라는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부각시키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육신가진 인생이 그리스도가 되는 법이 언제나 동일함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받은 믿음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보고 하나님이 자신을 만든 목적이 그와 같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 심령 속에 임한 그리스도의 본성을 성령이 생명이 되게 하시므로 그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육신의 수고로 나타난 행실이 되고, 그 행실을 본 사람이 다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알게 되어 그리스도가 되는 하나님의 법은 육신을 가진 사람들의 역사 속에 언제나 동일하고 유일하게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이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감추도록 하나님께서 가죽 옷을 주신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가죽을 제공했다는 것은 육신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담에게 주신 그 가죽 옷을 예수님을 예표한 것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구속은 육신의 희생, 육신의 수고라는 행실 없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 처음부터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법은 언제나 동일하고 영원하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되는 것은 반드시 어떤 희생, 행실이라는 육신의 수고 없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 말씀에 이어 여러 가지 교훈에 이끌리지 말라는 권면을 하고 있다. 여기서 여러 가지라는 말이 많은 것이 시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동일한 단 하나의 법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여러 가지라는 것은 이미 유일성이 무너진 세계다. 또한 이것 저것을 해본다는 것은 영원성도 무너진 것이다. ‘1+1’은 ‘2’라는 명제에서 보면 1+1이라는 것에 2라는 답이 있으면 더 이상 논란이 없다. 여러 가지를 논하고 있다는 것은 온전한 것이 없다는 것이고, 온전하지 않아 이것 저것을 논하고 있다는 것은 항상성과 영원함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 관점에서 은혜를 말씀하고 있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서 은혜를 구한다는 것은 앞서 설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고 동일한 본성을 설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은혜라는 것은 자기 힘으로 안 되는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잘 하는 것을 누가 도왔다고 해서 그것을 은혜라고 하지 않는다. 최소한 도움을 인하여 시간이 단축되든 힘이 덜 들든 자기의 정체성이나 능력 이상의 도움을 받았을 때 은혜라고 한다. 그렇다면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누군가가 자기 육신을 소비했다는 의미다. 즉 은혜는 반드시 희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담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주신 가죽 옷은 하나님께도 은혜를 입은 것이고, 특히 가죽을 희생한 짐승에게 은혜를 입은 것이다.


이는 당연히 예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니 그것을 알려 주신 하나님의 성실이 사람에게 은혜고, 하나님의 그 성실로 인하여 육신을 십자가에 드려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신 희생이 은혜다. 이것은 절대로 여러 가지의 세계가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예수님의 구속은 항상 유일하고 영원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희생을 인하여 우리가 삶의 목적과 인생으로써 정체성을 회복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은혜인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은혜를 육신의 일에서 찾는다.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게 하신 일이 은혜고, 늘 행위로 죄를 범하는 부족함이 있음에도 구원해 주셨다고 믿으니 그것을 은혜라고 생각한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죄 없는 자라고 하지 못하는 이유는 행위가 심판의 대상이 되는 세계에 있고, 그 세계의 선악의 기준으로 자신을 반추하면 늘 자신의 행위가 죄를 범하고 있음을 알기에 스스로 죄 없다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정체성인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세계가 아닌데 행위가 본질이고 자신의 행위가 늘 의롭지 않음에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다는 것에서 은혜로 여긴다.


그런 관점은 당연히 보이는 것이 나타난 본질이라고 믿는 신앙이고 세계다. 그러나 그 세계는 하나님의 세계가 아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아직 없는 세계라는 의미다. 이 세계를 히브리서는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유익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먹는 것, 입는 것과 같이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아는 것은 유익이 없다는 말씀이다.


이는 여러 가지 교훈에 끌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 안에서도 행위라는 눈에 보이는 세계를 어떻게 하면 그 육신의 세계가 평탄하고 성공하는 길이 될까 많은 고민을 한다. 그래서 ‘이래서는 안 된다’, ‘저렇게 해야 형통하다’는 등 여러 가지 교훈들이 넘쳐난다. 교회에서도 ‘성경 보는 것’, ‘능력을 행하는 기도’, ‘전도’ 등등 각양의 분야를 놓고 어느 것이 더 귀한 것인지 논한다. 귀하다는 의미는 어느 것이 사람들이 바라는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더 잘 이끌어내는지에 대한 논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먹고 입는 문제, 평안과 성공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행하여야 식물로 행하는 은혜를 얻을 것인지 여러 가지로 말하는 세계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이 스스로 알 수 없는 자기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알게 하신 하나님의 성실에 있다. 그 성실함에는 아들의 희생이 있다.


즉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사람의 행실이라는 육신의 수고와 희생이 있어 사람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게 된다. 이 법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유일하고 영원한 방법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행실, 곧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자기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사람들의 삶이다. 그 삶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보이신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알게 된다.


이것이 우리 마음에서, 심령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이것이 마음에 있어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에게 말씀을 알려준 사람들의 삶을 믿음으로 본 받아야 하는 이유까지 여기에 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