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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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당하신 능욕을 함께 지고 영문 밖으로 가자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영문 밖으로 상징되는 세상, 그 세상의 가치관 앞에 나를 내어주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삶이라는 것을 앞서 설명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많은 신앙인들이 세상이 악하다는 이유로 세상을 멀리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성도라고 인정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삶을 영위하려는 것은 영문 안에 거하고 예수님과 같은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같은 수치를 당하지 않겠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지 않겠다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그 안에 없다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다는 것은 거듭나지 않았다는 의미며, 그것은 하나님 아들이 아님이 들통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 곧 하나님 아들인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거할 도시는 이 땅에 없고 올 것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끼리 별도로 모여 사는 공간을 이룰 것이 아니라는 말씀일 뿐 아니라, 이것을 아는 세계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희생을 믿는 믿음을 가지면 알게 되는 영문 밖으로, 세상의 가치관에 나를 내어주는 세계에 속하게 되는 것을 소망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소망에 기인하여 하나님을 찬미하자는 권면을 하고 있다. 이것은 중요한 연결이다. 하나님을 찬미하려면 그 내용이 자신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어야 한다. 내게 기쁜 일이 아닌데 감사하라고 하니 감사하는 것은 외식이고 기만일 뿐 아무 이익이 없다.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찬미를 드리는 존재가 되려면 예수님의 일이 자신에게 기쁨이어야 한다.


그러면 히브리서가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신 일이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한 일이다. 그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기쁜 찬미를 드린다는 것은 예수님의 일이 정말로 자신에게 기쁘고 감사한 일이어야 한다. 이것은 나도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기쁘다는 의미다. 그렇지 않은데 남의 고난을 기뻐한다는 것은 아주 고약한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항상>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항상성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언가 꾸준하게 계속 행한다는 것은 그렇다. 성경에 나오는 ‘항상’이라는 개념의 주체를 행위에 두면 그렇다. 그러나 행위가 아니라 존재 정체성이라면 다르다. 사람은 항상 사람이고, 아들은 항상 아들인 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 생명의 말씀이고,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고 기대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알면 이 <항상>이라는 것이 성경에서 왜 주저함 없이 사용되는지 알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거나, 어떻게 하면 <항상>이라는 말씀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면 성경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도 모르는 것이고, 모든 말씀이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임도 모르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관점의 차이가 드러나는 절대적 좌표가 바로 십자가다. ‘항상’이라는 것을 행위의 연속성과 지속성으로 보는 사람들은 행위를 본질로 보기 때문에 죄도 행위를 기준으로 심판하고, 그 사함도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내가 지은 죄(행위)에 대한 벌을 예수님께서 고난이라는 행위로 대신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인생의 존재 정체성을 보인 것이라는 것이 보이면 예수님의 희생을 통하여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성경에서 우리에게 권면하는 <항상>이라는 것을 지키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면 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사람이 세상의 많은 것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만 늘 실패할 뿐 아니라 종국에는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삶을 마감하는 존재, 즉 자신의 존재의미와 삶의 목적을 스스로 알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시인하고서 보면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하시고, 그 목적에 합당한 존재로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보이시기 위하여 육신을 드리신 예수님의 희생에 찬미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 찬미를 드리자는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 말은 단순하게 하나님은 위대한 신이니 찬미하자는 것이나, 추리가 행위로 지은 죄들에 대하여 예수님을 보내사 대신 벌을 받게 하신 그 은혜를 인하여 감사하자는 말이 아니다. 백 번 물려 예수님의 희생이 우리 행위에 대하여 대신 벌을 받은 구속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지금 자신의 삶이 죄가 없는 삶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찬미하자는 것은 우리의 존재 정체성을 회복하게 하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자는 말씀이다. 그런 존재가 되자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내 인생의 목적이고 의미일 뿐 아니라,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까지 보이신 것이라는 것이 분명히 보이면 그때부터는 굳이 하나님을 찬미하자고 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찬미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보인다면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가서 세상의 가치에 나를 내어주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의 의와 뜻대로 되면 그때는 도리어 하나님을 찬미하지 않으려 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하지 않으려 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려 해도, 예수님과 달리 하나님 아들이니 세상의 가치로 좋은 것으로 대접 받으려 해도 되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이 소망이고, 그 소망에 자신을 순종하고 맞추어 가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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