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 옥합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9. 24. 04:00 Writer : 김홍덕

(마 26장, 막 14장, 요 12장)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향유 옥합 사건은 사건 자체가 감동적이기도 하지만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해 사람이 가진 각양의 생각들이 모두 드러난 사건이라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울러 이 사건은 앞서 영생을 얻기 위해 어떤 선한 행실을 하여야 하는지를 질문한 부자의 일과,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지를 시험한 일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이다. 그리고 양유 옥합 사건은 그리스도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하여 사람과 하나님(의 아들)과의 지속적 갈등이 완전히 표면화된 사건이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한 여인이 현재가치로 환산했을 때 일반 노동자의 1년 연봉의 가치를 지닌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버린 것이다. 이 일을 두고 예수님은 자신의 장사(葬事)를 위한 것이라고 하신 반면 그리스도는 가난과 같은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로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한 없이 어리석은 일이었고, 가룟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버리는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된 사건이다.

 

먼저 유대인들의 반응을 보면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동을 보고 분을 내었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데 쓰지 왜 예수님께 허비하느냐는 것이 이유였다.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여인을 보고 화를 낸 자들은 그 향유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직임에 맞지 않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에 화를 낸 것이다. 가난을 해결하는 것이 직임인 그리스도가 상당한 가난을 해결할 수 있는 향유를 자신이 소비하여 버린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기에 화를 낸 것이다.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 그리스도는 육신, 사회, 국가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로 보는 이들에게는 화를 내는 이들의 모습이 정상적일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본심은 그들과 같으면서도 단지 예수를 믿고 있다는 명분 아래 화를 낸 이들을 비난하지만 정작 자신들도 하나님께 자신과 혈육이 처한 육신의 문제를 기대하고, 성공을 바라는 기도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때로 교회가 현실 문제를 외면하면 비판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화를 내는 그들에게 정말로 뜻밖의 말씀을 하신다. 그것은 바로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향유 옥합 사건이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복음이 전해진 모든 곳에서 회자되다 보니 너무 익숙해 보이지만 이를 풀이하면 “나는 가난을 해결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선언이다. 더 깊이 풀어보면 “너희가 나에게 육신의 문제나 사회, 국가, 세상의 문제를 의지하려고 하지만 난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손절하신 것이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란 말씀의 본질적 의미를 가장 먼저 깨달은 자는 어쩌면 가룟 유다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이 사람은 우리가 기대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확신했다. 즉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이스라엘의 독립, 가난 구제, 병든 자의 치유와 같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께 환호한 모든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는 육신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분명한 선언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라는 존재는 육신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분명한 선언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묵상할 뿐 아니라 심지어 학문으로 연구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부유하게 되고,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게 해 주신다고 설교하고 가르치며 믿고 의지하는 것은 옳은 신앙이 아니라는 의미다. 예수님의 그 말씀처럼 오늘날도 여전히 가난한 자들은 우리와 함께 있고, 또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믿는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존재다.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높은 자리와 능력과 권세를 가진 이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을 추구하여 그것으로 세상을 바꾸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는 사람들의 주장에 의해 죄인이 되어 한 없이 낮은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바로 그렇다. 예수님이 우리가 행위로 지은 죄에 대하여 대신 벌을 받으려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그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자기 본성이기에 그 본성에 이끌려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무엇인지, 하나님 아들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육신 가진 인생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성품이 무엇인지를 그렇게 보이셨다. 그가 보이신 것과 같은 본성을 가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a christ)이고 거듭나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다.

 

이와 같이 옥합을 깨트린 사건은 옥합이 가진 세상의 재화로서의 가치와 그리스도라는 존재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로 보는 가치관이 합해서 보면 이 사건은 현실 사회 문제, 오늘날 교회가 사회를 대하는 방식과 궤를 같이하는 일반적인 상황으로 비쳐질 수 있지만 실상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한 갈등이다. 그리스도라는 존재를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아들 혹은 초인적인 존재로 여기는 사람과 그리스도는 세상의 가치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므로 육신 가진 인생을 통해 나타내시려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하나님의 갈등이다.

 

그리고 앞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부자가 와서 영생을 얻기 위한 선한 행실이 무엇인지를 질문한 것과, 유대인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지를 시험한 것은 모두 향유 옥합 사건과 뿌리를 같이 한다. 좀 정리해서 말한다면 이런 모두가 향유 옥합 사건에 수렴한다. 성경의 순서로도 향유 옥합 사건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갈등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가는 자들의 승리로 전환된다.

 

특히 영생을 선한 행실로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 부자의 생각과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것을 보고 ‘팔아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같은 생각이다. 이 생각은 부자 청년의 질문과 가난을 해결해야 한다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들을 하나의 단편적인 사건들로 보거나, 아주 절묘하게 연관된 두 사건으로 볼 것만이 아니다. 이들의 생각은 성경을 관통하는 죄, 곧 하나님과 다른 생각이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반대의 생각일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가치관이자 의로움이며 사람들이 가진 하나님과 다른 법이다.

 

부자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신 것은 표면적으로 보면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 곁에 있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과 달리 가난의 문제를 그리스도의 직임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부자가 그 말을 듣고 고민하며 돌아갔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재물이 가진 의미를 생각해보면, 재물은 행위의 소산이다. 선한 행실로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부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가진 재물은 영생의 티켓이다. 부자는 영생 곧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제물로 대변되는 선한 행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직임이라 생각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이런 생각이 문제가 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하나님 일의 본질로 보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이다. 즉 육신의 행위, 나타난 현상이 하나님이 생각하는 의로움과 선하심의 본질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가난과 독립과 같은 눈에 보이는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로 보며, 그런 가치관으로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예수는 자신들이 알고 있고 기대하는 그리스도, 메시아가 아닌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죽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아들을 자신들의 가치관으로 심판하여 죽이는 행위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즉 그리스도는 가난의 문제와 같은 현실 문제를 하나님 아들이라는 능력과 권세로 해결하는 존재라고 믿는 것은 하나님을 조각한 것이고, 자기들의 우상이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즉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다. 그것이 바로 선과 악을 스스로 규정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의미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선생이여’라고 부른 부자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고 반문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너의 가치관은 선악과를 먹은 가치관이라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향유 옥합 사건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와 예수님께서 보여주고자 하신 그리스도가 본격적으로 충돌한 사건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충돌한 사건이란 의미다. 그 충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사람들이 이긴 것과 같은 표면적인 결과를 낳은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여호와와 충돌하여 즉사한 웃사(대상 13장) 같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하나님과 다른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죽은 사람이다. 

 

사람들의 그리스도는 가난을 구제하는 그리스도인 반면 예수님은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라는 말로 그리스도는 그런 존재가 아님을 분명히 하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과 반대로 여인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시며 “이 일은 나의 장사(葬事)를 위한 것이며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전해질 일”이라고 하셨다. 복음은 예수님이 보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온전한 그리스도로 순종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이 순종되는 현장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는 일이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 향유를 주께 드린 일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항상 함께 한다는 의미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이라면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내어주는 그리스도가 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향유 옥합 사건이 예수님의 장사를 위한 것이라고 하심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찔리시므로 물과 피가 나온다는 것이고, 복음이 전해지는 모든 곳에 이 일이 전해진다고 하심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육신이 상하시므로 모든 사람이 향유가 널리 퍼지듯 복된 소식을 듣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육신이 상하시니 그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향기로 퍼질 것을 향유 옥합으로 예언된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은 이 여인의 일이 전해지는 것이다. 향기가 퍼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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