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 3:1-19) 하박국의 찬양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하박국 Date : 2021. 3. 5. 12:00 Writer : 김홍덕

하박국은 세상이 악한데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치를 하시지 않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한탄하면서 시작한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해이하게 만들고 공의롭지 않은 사람들을 이방인을 일으켜서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하박국은 왜 이방인이 심판을 하느냐?’는 새로운 의문을 가진 하박국에게 심판을 한 이방들도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전개된다.

 

그 말씀을 들은 하박국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므로 하박국 선지서가 맺어진다. 기도하고 찬양했다는 것은 하박국이 가졌던 의문들이 해소되었다는 의미다. 오늘날 우리가 이 하박국 선지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사실 하박국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이유가 자신의 것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악 그리고 심판을 하나님의 관점과 의의 기준으로 보는 순종적 이해가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박국이 마지막에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고,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자기 속심령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늘 세상은 악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실수도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다스리시는 세상이 악하다는 것은 의외로 심각한 문제와 오류를 가지고 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기 신앙의 모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먼저 세상에 대한 개념부터 재정립해야 한다. 육신으로 보는 물리적 세상과 사람들의 생각들이 지탱하는 사회가 세상의 본질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본질이 아니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나서 세상을 인식하므로 자기에게 세상이 열린다. 그렇게 인간 개인의 자아에게 인식되고 형성된 세상이 상호 결합된 것이 우리가 이야기 하는 세상의 본질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의 죽음은 곧 그 자신의 세상이 멸망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 하는 지구나 세상의 멸망보다 개인의 죽음이 더 완전한 세상의 멸망이다.

 

이와 같이 세상은 각 개인의 인식 위에 있다. 자기 생각 밖의 일을 보거나 들었을 때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는 것이 그것을 확인해 준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악한 세상은 사람이 자기 기준으로 정의한 세상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악한 세상>은 물리적 세상과 사회가 아니라 각 사람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자기 기준으로 정의한 세상, 그것이다.

 

세상에 악이 관영한데 하나님께서 방관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또 왜 하박국에게 하나님 앞에 악한 이방인을 들어 악을 심판하시는지에 대한 이유는 이와 같이 세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생각으로 인식하므로 형성된 세상의 결합인 사회와 물리적 세상은 하나님이 보실 때 분명히 악하다.

 

문제는 그 악함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은혜의 바탕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일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세상은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곧 영광이 나타나는 운동장이나 도화지와 같다. 하얀 색으로 그린 그림이 나타나려면 검은 도화지가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두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선악의 기준으로 자기 세상을 살고 자기 기준을 주장하는 세상에서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좇아 살아가는 것은 영광 곧 나타나고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했고, 또 한편으로 사람이 등불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빛으로, 영광으로, 의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은 드러나게 된다고 하신다. 드러나려면 드러나지 않는 것이 바탕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얼마 되지 않는 구원받은 자를 위하여 세상을 악하게 방치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아바타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무조건 하나님을 찬양하고 순종하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자기 의지로 하나님의 의를 순종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

 

다만 사람이 그 자유를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을 선택하고 있을 뿐이다. 자기가 조성하지 않는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기에 그렇고, 자기 보기에 그것이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 인생을 자기 것으로 선택하고 자기 세상을 살며 주장하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의를 선택하므로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3:6)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로 세상을 형성하는 사람은 악한 세상의 구성원이자 자기의 모든 세상은 악한 사람이기도 하고 역설적으로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 앞에 온전한 하나님의 의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보이셨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렸을 때 스스로 보는 자는 살았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자신의 존재 목적과 정체성이 저것이다!’ 깨닫고 순종하는 선택하는 것을 사람에게 맡기신 것이다. 달리 청지기라 하심이 아니다.

 

이러한 원리, 아니 하나님의 법을 알면 세상이 악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의 자기 옳음과 그에서 비롯된 선악에 대한 기준 그리고 가치 기준으로 보는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순종하는 것이 아니기에 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알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으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 역시 너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세상은 모두가 자기 의를 주장하기에 서로가 서로를 각자가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대하니 항상 서로를 심판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의는 서로를 용납하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자기 주장하는 자에게 종이 되어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인데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조성하지도 않은 자기 인생을 가지 것으로 훔친 자들은 모두 이방인인 것을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를 심판하므로 성취하려는 높은 곳은 거할 곳이 적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올라가도 하늘 아래에 있으니 설령 가장 높이 오른 자라 할지라도 결국 높이 올라가는 것이 선이라는 자기 가치관으로 자기 스스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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