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 교회에 다닌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교회가 아니라도 특정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사람들이 그렇게 종교를 가지는 것은 나름 어떤 이익이 있어서일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익이나 유익이 없는데 그렇게 많은 것을 희생한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고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사람에게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분명히 믿는 사람들에게 어떤 유익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유익이 생긴다고 치면 하나님께는 어떤 유익이 있는가? 하나님을 믿어주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 페이스북 친구가 많아지듯이? 아니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세상에서 성공하여 부자 되고 성공하고 병이 낫게 되므로 세상의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 어떤 것이 하나님께 이익이 될까?


사람들은 자신들은 보잘 것 없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위대한 창조주이기 때문에 이 관계에서 사람들이 이익을 얻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모두 만드셨을 뿐 아니라 언제든지 또 얼마든지 줄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단지 자신을 의지하고 믿어 준다는 것 하나만으로 사람들이 유익이라고 생각하는 가치들에 있어서 마냥 공급자가 되시기만 하시기로 하신 분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이익이라는 측면, 누구에게 어떤 이익이 있느냐의 문제를 이야기함에 있어 이익을 가져오는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가치가 없는데 이익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익이 없는 것이 주어지는 것을 사람들은 ‘짐’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즉 사람들이 하나님께 구하여 얻기를 바라는 것은 사람 혹은 하나님의 가치관 안에서 어떤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바라고 교회에 다니는 것 아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 보자.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그 가치가 먼저는 하나님께서 가치로 여기시는지,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서도 가치로 여기신다면 하나님은 어디서 수익을 얻으실 것인지를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하나님께 얻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치로 여기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그것은 언제라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성실하신 하나님께서 그게 귀찮을 리도 없다.


하나님의 가치는 사람들과 다르다. 그래서 거룩하신(구분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세계, 사람의 육신과 안목이 바라는 눈에 보이는 것을 가치의 본질로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목적>을 가치로 보신다. 의와 뜻을 가치로 보신다는 것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가치가 있는 것은 피조물이 얼마나 창조하신 목적 안에 있는지의 여부다. 그게 가치의 본질이다. 그게 먼저다. 그게 하나님께 이익이 되는 유일한 것이다.


이는 사람이 가진 가치관도 같다. 사람이 가진 모든 가치도 목적에서 비롯된다. 이동을 제공하지 않는 자동차는 전혀 가치가 없다. 보통은 그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가치로 자동차를 본다면 이동을 수반할 필요는 없지만 그 역시 목적이 다른 것이지 가치가 목적에 기인한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본성에 기인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어서 자기 유익을 취하려 한다. 세상에서 잘살려고 예수를 믿는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서 성경을 지킨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자기 원하는 바를 들어 주실 것 같기 때문이다. 목사는 물론 선교사도 그것을 전하러 다닌다. 그것을 주의 일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그것을 가치로 여기지도 않는데 그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가치 없는 것을 일로 여긴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사람이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으니 지은이가 이익을 얻어야 정상이다. 만든 이가 이익을 얻지 못하는데 누군가가 가져가면 그것이 강도고 도적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에게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심이 그것이다.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익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사람이 하나님의 피조물과 종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아무 이익이 없는가? 적어도 세상에서의 이익은 반드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 필요한 재화나 건강과 같은 것은 하나님이 뜻하신 목적을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때로 하나님이 뜻하신 목적을 위하여 가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병들거나 험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단지 사람들은 목적을 별개로 그런 일 자체를 벌이나 악으로 여길 뿐이다.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에서만 가치를 찾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서 얻는 이익은 전혀 다른 것에 있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로서 택함을 받았다는 것에 가치를 발견했을 때 비로소 그 이익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가치고 볼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려면 하나님과 같은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즉 피조물로서 창조주와 같은 의를 가지는 놀라운 이익을 얻게 된다. 물론 그것이 가치로 보이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옛날 아프리카 소년들이 다이아몬드 원석을 던지고 논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의와 뜻을 가치로 보지 못하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이익이다. 이 이익을 안다면 절대로 눈에 보이는 육신의 문제와 세상의 일을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에 가서 육신의 안녕과 세상에서의 복을 구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것을 믿으면서 하나님께 이익이 되지 않는, 하나님의 정체성에 부합되지 않는 눈에 보이는 가치들을 얻으려고 예수를 믿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자신이 피조물임을 인정한다면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이익이어야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이 자신에게 은혜인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 가치관과 안목이 같아 질 때 그것을 알 수 있으니 그것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임을 발견하는 것이다. 


피조물에게 그만한 이익이 또 있겠는가?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 먼저 이익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가치 있는 것으로 보시는 것,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자신에게 은혜와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께 이익이 되기에 나에게도 이익이 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게 우리의 유일한 이익이다. 그것을 성경이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