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드러난 교회의 밑천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21. 10. 29. 12:43 Writer : 김홍덕

코로나가 창궐한지 어느새 2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그로 인해 우리의 일상은 많은 변화를 겪었고 어떤 변화들은 아예 미래의 생활 방식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런 중에 신앙 공동체라는 교회 역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분명 그런 변화들을 고찰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의외로 크게 공론화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건 아마도 오늘 이 글에서 논하려는 이유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우한 폐렴이라 말하고 싶다.)가 창궐하면서 교회, 아니 교인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온라인 예배와 같은 변화에 순응하는 사람들과 지속된 코로나의 위험성 경고를 무시하고 어떻게든 오프라인 예배를 강행하려는 사람들,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두 부류는 다른 신앙일까? 신앙이 다르다면 그 신앙에 따른 심판과 상급 역시 달라질 것인가? 이런 문제를 생각해보면 그건 의외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육신의 삶이 도모하는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건 교인들이 교회에서 어떤 기도를 하는지를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신앙인들의 소망의 뿌리는 의외로 두려움이다. 하나님이 명하신 계명을 지키지 않았을 때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일상에서의 위험, 기대하지 않고 바라지 않는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다.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육신의 삶이 도모하는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사람이 가진 두려움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그것을 이용해서 이익을 편취하는 사람들이 늘 있다. 나는 신학자와 교역자들이 그런 부류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늘 성경대로 살지 않거나, 교회에서 명한 것을 하지 않거나, 목사의 말을 듣지 않으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 되지 않는다고 위협하고, 심지어 죽어서 천국에 가지 못하거나 가더라도 가난뱅이로 살 것이다.’라고 설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두려움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오프라인 예배를 강행하고자 하는 사람이나, 온라인 예배에 순응하는 사람이나 모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두려움의 대상과 대응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온라인 예배에 순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헌금을 바쳐가면서까지 잘 되기를 바라는 일상이 코로나 확진으로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지 않는다. 그래서 코로나 이전에 회사가 휴일에 근무하러 좀 나와 달라고 해도 주일을 성수해야 한다며 악착같이 지키려던 오프라인 예배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온라인 예배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예배는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나뉘었지만 그 뿌리는 결국 두려움

 

오프라인 예배를 강행하려는 사람들은 또 다른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들의 두려움은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지 않고 일관적이라는 점에서는 칭찬해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는 것이고, 그 죄로 인하여 일신 상에 원치 않는 일을 당할 수 있다는, 즉 하나님께서 벌하실 것이라는 고정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회가 그렇게 우려를 표하면서 심지어 교회를 폐쇄하겠다고 해도 그렇게 오프라인 예배를 강행하고 있다.

 

물론 오프라인 예배를 강행하는 사람들의 신앙을 철저한 사명감이나 굽히지 않는 충성으로 볼 수도 있다. 그들의 행동 자체로만 보면 분명히 그런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온라인 예배로 태세를 전환한 사람이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오프라인 예배를 강행하는 사람들 모두 앞서 설명한 두려움에 대응하는 모습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오프라인 예배를 강행하는 모습을 충성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렇듯 교회는 코로나라는 재앙 같은 사회 현상 앞에 두 가지 큰 스탠스를 취했다. 그 중에서 아무래도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쪽이 임시라는 변명을 덧붙인다고 해도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 이는 오랫동안 지켜온 예배의 형식에 대한 변화에 대하여 별다른 저항 없이 순응했다는 증거다. 즉 이때까지 예배학이라는 학문까지 만들어가면서 연구하고 고수하면서 지켜온 예배의 형식이 모두 허상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한 것이다.

 

코로나 앞에 휴지처럼 버려진 예배학과 주일 성수

 

그리고 예배학이라는 학문까지 만들어 순서와 격식을 지키려던 노력과 주일 성수라는 성스러운 신앙행위가 코로나라는 사회적 유행 앞에 별것 아닌 것으로 전락했음에도 어떤 회개나 뉘우침이나 반성도 없는 모습이다. 자신들이 그렇게 고수해오던 것을 버리거나 왜곡하고 타협했지만 이때까지 지키려던 것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는 고백이나 반대로 이런 순응이 예전에 그렇게 주장했던 것처럼 주일 성수가 아니었다고 회개하고 고백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러 교묘한 타협은 모두 앞서 언급한대로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라는 모래성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려움의 대상은 육신의 삶이다. 육신의 삶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어떤 불행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다. 그래서 신앙이란 것이 하나님을 믿으면 하는 일이 잘 된다가 된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교회가 이런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버린 것이다.

 

기독교가 가진 가장 큰 두려움은 육신이 잘되고 불행이 없기를 바라는 소망에서 온 것

 

그래서 어떤 이들은 코로나로 인한 육신의 불행을 두려워 온라인 예배로 타협했고, 어떤 이들은 코로나로 인해 하나님께 지키던 습관을 변경하므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육신의 삶을 벌할까 두려워 사회적 지탄을 감수하면서 오프라인 예배를 드린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모두 자신들의 신앙이 육신의 삶이 잘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라는 것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의 소망이 행여 불행이 될까 두려워하여 어떤 이는 온라인 예배로 어떤 이는 오프라인 예배 강행을 선택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자신들이 이때껏 그렇게 지켜온 예배에 대한 신앙이 변질된 것에 대해 회개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지속될 것이다. 육신의 안녕을 바라는 신앙을 버리기 전까지.

 

 

그렇다면 끝으로 어떤 신앙이 되어야 하는지 잠깐 생각해보고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이미 분명하게 말씀을 해 두셨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함께 하시겠다고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인데, ‘대한 <예수>교 장로회라고 써 붙여 놓은 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는 육신의 안녕을 추구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신 분이다.

 

진정한 예배는 육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

 

그렇다면 어떤 예배가 온전한 것인지 분명하다. 육신이 세상 가치 기준으로 평안하고 성공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기만 하면 온라인, 오프라인 구분 없이, 또 코로나 앞에 휴지 조각이 된 예배학과 무관하게 언제나 예배 드리는 사람이고, 코로나 아닌 세상의 어떤 변화에도 늘 예배 드리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어떤 형태로 모이든 진정한 예배와 교회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어야 할 예수이자 우리가 드릴 예배다.

 

오늘날 교회는 코로나라는 세상 일 앞에 갈팡질팡하고 스스로 자기들의 신학과 신앙을 버렸다. 그렇게 교회가 육신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만 천하에 드러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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