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서 요셉이 해석한 바로의 꿈과 같이 7년간은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7년은 흉년이 들었는데 애굽뿐 아니라 온 세상이 다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은 요셉이 총리로서 7년간의 풍년 동안 곡식을 잘 저장해 두어서 흉년을 견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흉년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먹을 것이 없는 것을 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은 외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눈에 보이는 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은 그 사건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인생의 배고픔은 단지 육신의 배고픔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본질적인 배고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생이라는 존재는 다 어떤 것에 대한 배고픔과 갈함이 있는데 그것이 육신의 배고픔과 갈증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사람이 육신이 표현하는 모든 것이 사람 안에 있는 본성과 생각이듯이.


요셉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표상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 그 삶의 많은 부분은 예수님의 그림자와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요셉이 총리대신이 될 때 애굽의 왕 바로가 요셉을 일컬어 사브낫바네아(Zaphenath-Paneah)라고 했는데 그 이름의 뜻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하나님은 말하시고 살아계신다.’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요셉은 바로의 꿈에 대하여 꿈은 하나님의 하실 일을 보이신 것이라고 했습니다.(창 41:25) 그러니까 꿈은 바로의 꿈이지만 그 꿈에 대한 의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에서 그 꿈이 애굽, 곧 세상에서 나온 부유함이 세상에서 나온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바로에게 이르기를 총명한 자를 세워 그것을 대처하라고 했고, 바로는 요셉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고 그에게 그 꿈에 대처할 수 있도록 맡겼습니다.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창 41:39-40)

그래서 바로는 요셉의 이름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말씀하신다는 이름을 주고 하나님이 꿈으로 보이신 하실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무엇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모든 인생이 가진 배고픔, 바로 자기 존재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배고픔과 갈증은 애굽의 젓줄인 나일에서 나온 암소와 같이 우선은 세상의 풍요함으로 채울 수 있을 것 같지만 역시 세상에서 나오는 배고픔이 그것을 다 먹고도 부족하게 되어 결국 사람은 늘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세상에서 찾지 못하고 허망하게 될 것이기에,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총명을 가진 사람이 나와서 그 일을 해결함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요셉이 감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셉에 대한 말씀을 대할 때면 예수님과 오버랩 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배고픔과 갈증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신 그 정체성, 십자가에서 보이신 사람이란 존재의 본질이 바로 우리가 창조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풍년으로 넘치는 곡식을 잘 관리하여 흉년에 대비한 것입니다. 마치 전도서의 말씀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 12:1)

과 같이 우리가 아직 육신에게 힘이 있고, 또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을 하나님을 알아 가는데 사용할 여지가 있을 때에 하나님을 찾는 것에 수고하여 육신의 존재 목적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이 말씀과 함께 안식일에 대한 말씀도 같이 상고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대하여 말씀 하실 때에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출 20:9)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성경에서 육일 혹은 여섯은 언제나 사람을 나타내는 사람의 수입니다. 엿새 동안 수고하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육신의 모든 것을 안식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에 소비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안식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람이 회복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안식하셨고, 하나님이 안식하시니 우리가 안식하는 관계이므로 우리가 안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더 이상 배고픔도 갈증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육신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소비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것에 대하여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라고 하셨습니다. 즉 세상의 풍족함, 세상의 모든 것, 또 우리 육신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도록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인 바로가 하나님의 행하실 일을 꿈꾸고 그것이 요셉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입니다. 그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생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고 삶의 의미에 배고프고 목마른데 그 배고픔과 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세상의 풍족함, 육신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때에 그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알아서 존재 정체성의 갈증과 배고픔을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꿈과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한 일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생각해 보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우리이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목적이 된 사람이 나오기를 바라심을 성경을 통해서 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의가 삶이 된 사람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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