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의 다섯째 날에는 바닷속의 생물과 공중을 나는 새들을 창조하셨다. 지금 이 천지창조의 과정은 세상의 현상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하나님께서 설명하시고자 함이 아니라고 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자아가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가는(회복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 곧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회복되는 과정은 사람이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만드시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온갖 동물들을 데리고 와서 이름을 짓게 만드시는 장면이 나온다. 통상적으로 어떤 물건을 새롭게 만들게 되면 만든 사람이 그 이름을 부여하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 부여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하나님의 형상(모양이 아니라 정체성)을 가졌다는 말씀이다.(이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


그러므로 이 천지창조의 과정이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의 의미가 새롭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자기 안에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재 해석되는 것, 그것이 어쩌면 자신이 창조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 날부터 지금 다섯째 날 까지 모든 과정이 세상이 현상계적으로 어떻게 창조되었는지에 대한 것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우선은 나의 자아가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지에 대한 과정이고, 또한 하나님과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이 세상이 나에게 어떻게 수용되는지, 아니 수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과정이 바로 천지창조인 것이다.


그럼 다섯째 날의 창조를 보자. 성경에서는 바다는 세상을 표현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힘과 자신이 만든 신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 철학이나 과학과 같은 세상의 학문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삶고 살아가는 세계를 말할 때 바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공간적인 세계가 아니다. 그러니까 교회라는 공간은 하나님의 세계이고 도심 속은 세상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사람이 정체성을 두는 공간을 말한다.


천지창조의 과정에서도 둘째 날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물을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이 가진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는 것에는 세상의 것과 하늘의 것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궁창 아래의 물 곧 바다의 물은 사람이 가진 정체성의 갈증을 푸는 물이 아니라고 했다.

 



<사진 출처 : www.scienceall.com >


그런데, 그 바다에 하나님께서 생명체를 만드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복을 주셔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을 축복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떠나 하나님을 믿기를 바라시면서 왜 세상과 같은 바다에 생명을 만드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 생명에 복을 주고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바다의 생명체들을 만드셨고, 또 왜 그들에게 복을 주셨는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오늘 나에게 다섯째 날의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 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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