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역사가 거듭되면서 과학적으로 또 많은 학문 분야에서 큰 발전들을 이루어왔다. 하지만 정작 사람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어둡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어두움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니,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그 하나만 알아도 그 관계는 분명해질지 모른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어두움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이 바로 광명이다. 이것은 첫째 날의 빛과는 다른 의미이다. 빛은 모든 것의 시작이고 인식이다. ‘무엇이 밝은지? 또 무엇이 어두운지?’ 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에 있는 모든 암흑에서 어떤 인식이 시작되는 것이 첫째 날의 빛이라면, 넷째 날의 광명들은 그것을 어떻게 비추어내는 것인가 하는 개념이다. 태양도 빛을 내는 것이지 빛 자체는 아니고, 달과 별은 태양에서 나는 빛을 반사시키는 것일 뿐이듯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9장에서 자신이 있는 동안은 세상이 낮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빛이 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왜 빛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물리적인 어떤 광원이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빛이 되신 것은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인생에게 있어 인생의 목적을 인식하게 해 주시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천지창조의 과정이다. 공허와 혼돈 가운데 있는 인생이 인생의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자리에 이르는 것이 바로 천지창조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지신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라고 하셨다.(요 1:14) 다시 말해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을 가지고 비춰내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빛이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태양에 비유할 수 있다. 태양은 빛을 비추어 낸다. 말씀이 육신이 되듯 빛이 태양이 된 것이다. 태양이 비취면 우리가 낮이 된다. 창세기의 넷째 날과 같이.


그리고 밤을 주관하는 달이 태양의 빛을 비추어 내듯, 하나님에 대하여 어두운 세계에서도 철학이나 과학이나 세상 각양의 이론들도 하나님의 세계를 비추어내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것이 넷째 날의 어두움을 비추는 빛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넷째 날의 광명들은 어떻게 보면 광명 자체가 주체가 아니라 창조의 결과는 낮과 밤, 혹은 밝음과 어두움이다. 하나님께서 넷째 날에 만드신 것은 빛과 어두움인 것이다.(창 1:18)


그런데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빛은 그렇다 칠 수 있는데, 어두움을 만들어 놓고 좋다고 하셨다는 것은 간과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사실 이것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하여 깨달아 가는 과정에서 어쩌면 절대적인 문제일 수 있다. 이후에 나오는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에덴 동산에 악이 포함된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아의 방주에는 아예 부정한 짐승을 태우라고 하셨다.


또한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자기 안에 악을 행하려는 마음이 있다고 했고,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에게 부정한 것들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것을 먹으라고 하시는 것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반에 이렇게 낮과 밤, 선과 악,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같이 두려는 것이 늘 흐르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왜 그럴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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