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그릇의 선택 - 선택의 실체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10. 20. 04:00 Writer : 김홍덕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생명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막 8:34)


예수님의 본성은 하늘의 천군천사를 불러 십자가로 끌고 가려는 군병들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과 같이 끌려가는 선택을 했다. 예수님의 그 모습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으로 사는 사람 역시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로 가는 선택을 한다는 말씀이다. 성경은 십자가로 가는 예수님의 선택을 이끈 그리스도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 말씀하는 책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는 삶이 성경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나는 것이라고 하고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을 이룬다는 것이 자기 욕망을 억제해가면서 신념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본성으로 사는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그냥 살뿐인데 성경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 본성으로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천군천사를 부르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성경을 이루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그냥 예수님 안에 있는 본성이 그렇게 선택한 것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한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면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고 그 생명의 본성으로 살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지라고 했으니 지자고 마음먹는다고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경험적으로 다 알고 있다. 이것을 부인하면 양심에 화인 맞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모든 선택은 예수님 같이 십자가로 가는 선택이다. 낮아지는 선택을 한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이 그렇게 선택하게 이끈다. 십자가는 세상의 법이 하나님 아들을 정죄하는 자리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인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선악과를 먹고 죄와 사망에 빠져서 그들의 가치관을 모아 만든 법 앞에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육신의 수고와 섬김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곳이 십자가다. 거듭난 사람의 본성은 그것을 선택한다.


사람 사이에 한 사람이 스스로 먹은 선악과의 기준에 따라 옳은 사람이 된다면 상대는 종이 되고 죄인이 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선악과를 먹은 가치관으로 스스로를 선하게 여기고 선한 자리에 앉게 되면 상대는 종이 되는 것이다. 그 법은 그들 사이에서는 당연하다. 그들 스스로 그 법에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가치관을 모아 스스로 종이 되었으니 너무 당연하다. 그래서 높은 곳으로 가려고 한다. 패자와 종이 될 수 없다는 간절함의 표현이다.


그러나 모두들 위로만 가려고 하니 다툼이 늘 있다. 그 굴레에서 그들 스스로는 구원을 할 수 없다. 더 높이 가려고, 또 그 세계에 적응하려고 끊임없이 인생을 단련하나 그 단련과 노력은 무화과 나뭇잎과 같다. 금방 마르고 또 새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끝도 없이 종살이한다. 거기서 벗어나려면 희생이 있어야 한다. 낮아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높아진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여긴 것과 같이.


물론 예수 믿으니 낮아지려고 겸손을 떨기도 한다. 그러나 본성이 바뀌지 않은 사람은 잠깐은 모르겠지만 항상 낮은 상태로 있을 수 없다. 늑대가 고기를 참는 것은 한계가 있다. 또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양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낮아지는 본성이 없는데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 바로 참고 있는 늑대다. 낮은 자리로 가라고 하니, 그래야 복을 주신다고 하니 높이 가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고 낮아지는 것은 거저 몇 번은 가능하겠지만 낮아지는 본성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될 일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높아지려는 사람을 구할 희생이 될 수 없다.


그 희생은 죄 없는 이가 하는 것이다. 죄 있는 자의 희생은 아무 소용이 없다. 높아질 본성이 없는 존재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로 사람을 대하시니 낮아지는 것이 본성인 사람이 죄가 없는 존재다. 높아지려는 마음이 있는데 성경이 낮은 자리로 가라고 해서 참고 앉아 있는 사람은 죄인이다. 그의 희생으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구원의 확신과 자신을 정죄하지 않는 세계에 있어 자신이 죄 없음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어야 이 희생이 의미가 있다.


선악과는 아담이 먹었지 아담에게 가죽을 내어 준 양이 먹은 것이 아니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으려면 선악과의 문제가 없거나 해결한 사람의 희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낮아지는 본성이 없는 사람은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다. 하나님 같이 되려고 높은 곳을 앙망하는 사람이다. 그의 희생은 죄인을 구할 수 없다. 그는 존재의 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으로 보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희생도 의미 없고, 십자가도 질 수 없다. 전도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의 희생이 다른 사람을 구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희생의 자리로 가는 본성조차 없으니 진정한 희생도 없다.


그래서 먼저 점도 없고 흠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희생의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보고 자신이 미운 오리 새끼처럼 자리를 떠나 있었음을 알고 자기 자리를 회복하여 선악과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첫 열매가 되시고 장자가 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십자가가 우리에게 구원이 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선택하는 실체이고, 예수님을 군병에 이끌려 십자가를 지게 한 선택의 실체이다. 그리스도라는 존재의 본성이자 정체성이다.


그렇게 의로운 사람은 그 속에 있는 본성이 삶의 모든 순간에 마주하는 사람들, 사건들 앞에 나를 부인하고 내어 주게 된다. 내가 선택한 인생의 존재 목적이 삶의 모든 순간을 십자가로 끌고 가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는 선택만 할 것이다. 의지가 아니라 본성이다. 가끔 정신 차리고 높은 곳으로 가려고 해 봐도 안된다. 시도는 할 수 있겠지만 되지 않는다. 그것이 생명이 거듭난 모습이다. 그런 상태가 되었을 때 십자가가 구원임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성경대로 사는 유일한 법이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유일한 길이다. 질그릇의 바른 선택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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