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아버지, 기독교인들에게는 입에 붙은 말과 같이 익숙한 말이지만 왜 하나님이 아버지이신지 안다면,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고 감사한 일이며, 남은 인생을 오직 주를 위하여 살 수 밖에 없게 하는 진정한 신앙의 진수가 아닐까 생각된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여!” 이 얼마나 환상적인 호칭인가? 이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 있어 정말 의미가 있는 것은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의 정체성에 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기를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대부분 이 세상에 관한 것이 아닌가? 그것이 가난한 사람을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라서 숭고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 모든 것이 대상의 차이와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결국은 먹고 사는 것을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며,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한다고 해도 그 또한 세상의 것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일 뿐이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 앞에서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말씀만으로 만드신 세상이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만드신 목적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상을 몇 번이고 만드실 수 있으신 하나님 아니신가?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죄악이 관영하자 홍수로 세상을 다 쓸어버리셨던 분이 아닌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필요에 관한 것이나 세상의 평안을 목적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아니시다. 그러셨다면 처음부터 칼과 같은 것은 필요 없게 만드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신 목적은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표현하시기 위함이지, 그 목적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들의 안녕을 목적으로 하신 하나님이 아니시다. 피조물의 안녕은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루치씩만 취하라 하신 것이고, 이어 나오는 주기도문에도 일용할 양식이라고 표현하시는 것이며,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 하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에 대하여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이라고 하셨다. 이름은 정체성이다. 코끼리는 코가 길어 코끼리다. 그게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대인들은 사람이 태어나도 그 이름을 우리처럼 바로 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라는 것을 보고 이름을 붙이고 그 전 까지는 누구의 아들 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예로 ‘바요나 시몬’이라 하는 것은 요나의 아들 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라면서 나타내는 성향을 보고 이름을 붙인다. 그래서 세베대의 두 아들에게는 보아너게(우뢰의 아들)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아마 성정이 불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공로나 소유에 감복하시는 분이 아니라 ‘너는 나에게 어떤 존재이냐?’를 물으시는 <존재의 신>이심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 정체성이 같은 존재가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쿵푸펜더에서와 같이 거위 아버지에 펜더 곰 아들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없다. 고로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그 아들의 정체성도 존재에 의미를 두는 존재라는 것이지 무엇을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곰이 거위에게 아버지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의 본질적인 의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심은 우리가 기도할 내용을 가르치심이라기보다 존재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천주교에서는 주기도문을 몇 번 외워서 회개하는 것도 있다고 한다.(영화 “신의 딸들” 중에서) 하지만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께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그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는 것은 내 아버지의 이름이 다른 이름과는 구별이 되는 이름이라는 의미이다. 거룩함이라는 것의 본연의 의미가 ‘구분되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그 이름 곧 정체성이 구분되시는 아버지께 아들로서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며, 정체성이 구분된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존재의 신이며, 아버지께 아들로서 구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하심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어떤 수고나 재물을 상납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는 관계가 아니다. 그런데 큰 교회에서는 하나님께 많이 헌금하고, 많이 수고하고, 더 힘든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가르친다. 세상 어디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런 관계인가? 용돈 더 주면 아들이고, 그렇지 않고 자기 위해서 돈을 쓰면 종이 되는 것인가? 그런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셨을 때 예수님을 버린 그 아버지이신 것이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아들 삼으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셔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말씀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아버지, 즉 소유와 공로를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그 아버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끌고 가는 아버지며, 십자가에 달린 아들을 구원하지 못하는 아버지이고,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이 만든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그들이 조각한 우상과 같은 아비지인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낳아지는 세계이고 존재 자체를 수용하는 관계이다. 무엇을 드리고 드리지 않음에 따라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그런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다. 아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기쁜 존재로 여기는 아버지가 아버지인 것이다. 그저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너무 기쁘고 사랑스러워 그를 위하여 목숨도 버리는 것이 아버지이다. 그 아들은 아버지가 가진 의와 본성이 육신으로 나타난 그러니까 성육신 된 존재가 아들이고, 아들에게 아버지는 자신이 가진 모든 의가 그 안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기쁨이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은 우리가 무엇을 드리기 때문이나, 교회에서 어떤 봉사를 많이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신 의를 표현하는 존재가 됨으로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는 당연히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에 있는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듯 말이다.


세상에서도 비록 육신으로 낳지 않은 사람이라도 자기 아들 같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자신이 가진 소망과 생각을 실현해 주는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은 하나님께서 생물학적으로 예수님을 낳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가진 말씀이 육신(요 1:14)이 되었기 때문에 아들이 되는 세계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방법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임신과 탄생으로 아들이 되는 세계라면 예수님은 몰라도 인류 역사상 다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이와 같이 바울도 디모데를 향해서 내가 너를 낳았다 했다. 바울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자신의 모든 의와 생각을 디모데가 행하며 살아갔기에 디모데는 바울의 의에 대하여 낳은 아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다. 위대함은 이미 세상에 수없이 많이 지으셨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람이 나타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이다. 사랑은 위대해지는 방향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어떻게 내가 강해지는 것이 의가 되는 사람에게 연약한 존재가 사랑의 대상이 되겠는가? 그들의 눈에는 그저 패배자로 보일 뿐이다. 그래서 건축자의 버린 돌과 같이 버림을 받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을지라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운명을 받으시듯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 들여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그런 연약한 존재라는 고백이 있을 때 오히려 모퉁이 돌을 삼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모퉁이돌이라는 것이 위대하고 화려한 건축물을 지으려는 건축자의 위대한 기준에서 벗어난 존재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본질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이라는 것은 그렇게 자신의 연약함이 인정되는 존재들 사이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연약하게 지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말과 같이 다리는 다리도 주시지 않고, 코끼리 같은 힘도 주지 않으셨고, 날개도 아가미도 없이 만드신 것은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을 표현하기에 너무 적합하기에 그렇게 만드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의가 나타나는 육신을 가진 존재가 되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성육신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1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하나님의 법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법 아래에서 되는 것이지 달리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의 육신을 통해 나타낼 때, 아버지의 의가 성육신이 되었던 예수님처럼 아들이 되는 것이지 그냥 난데없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롬 8장)고 하니, 그냥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삶이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삶이 되었을 때, 즉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듯 우리의 삶이 그러한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에서 말씀하시고 성경에 기록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법과 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존재의 관계로 회복되고, 우리의 모든 본성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되, 예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심 같이 우리도 존재이신 하나님의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가 되어서 부르는 이름이지, 공간적으로 하늘같이 인간이 이르지 못할 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일단 아버지라 불러 놓고, 당신께 좋은 것 드릴 수 있게 내 삶을 부요하게 해 주십시오 기도하는 그런 사기나 치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존재가 되지 않는다면 주기도문을 천만번 외운다고 해서 죄가 사하여 지기는커녕 인생을 낭비하는 죄만 더할 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큰 교회들은 이런 주기도문을 마치 주문처럼 예배순서의 마무리로나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드린다는 것,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기에 온전한 존재가 되어 기도하는 것은, 그 자체가 삶의 구원이요, 영광이요,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어 살아가신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은 소유와 공로로 기쁘시게 할 수 없는 분명한 존재의 신이시며, 우리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만나시기를 원하시는 분으로 확실히 구분되는 신으로 신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는 그 말씀 속에는 <너희는 하나님을 소유와 존재의 신들을 믿는 신앙과 분명하게 구분이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아들이 되어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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