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후반부는 누가복음에는 없지만 마태복음 6장 13절에는 ( ) 안에 “대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이라는 말씀이 있고, 주석에는 ‘고대 사본에는 이 구절이 없음’이라고 되어 있다. 성경에는 지금 우리는 한 권으로 보지만 원래는 두 권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요한복음 21장이라던가 마가복음 16장 14절 이후와 같은 성경들이 있다.

 

이렇듯 성경을 기록한 기자들이 적은 성경에 이후에 사도들이 추가한 내용들이 있게 된 것은 전부 교회 시대가 시작되고 교회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교회 안에서 더 확실하게 깨우쳐지면서 이것을 이전에 기록된 내용들을 보강하거나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성경은 대단히 함축적인 표현들이 많다. 요한복음 마지막에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다 기록한다면 책을 세상에 두기도 힘들다’했다. 예를 들어 마태를 부르실 때 “나를 좇으라(마 9:9)” 기록된 것이, 단순히 마태에게 그 말 한마디 했다고 따라갔다고 보면 곤란하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가 성경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을 생각해보니 그 모든 말씀과 그 때의 부르심이 “나를 따르라”하신 것이구나 깨달아져서 기록한 고백적인 기록인 것이다.

 

그것처럼 주기도문에 나오는 “대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라고 하신 것도 마태가 교회 시대에 성경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보니, 앞에서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들을 자기의 의로 삼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 보였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구나 하는 것이 또한 깨달아졌으며, 그것을 보니 그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 있고, 그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 보여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때 가르치신 것이 생각났거나, 깨달아져서 기록에 함께 넣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기도는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가 이루어진 나라, 즉 교회 시대에 보는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의 영광과 권세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기도인 것이다.

 

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곧 모든 뜻을 가지신 아버지가, 내 안에서 소유와 공로를 좇는 내 마음에 있는 다른 신들과는 거룩하게 구분되어 임하여 주시고, 그 뜻이 하늘이 바뀌면 땅이 바뀌듯 흙으로 지으신 내 인생에게 임하게 하시며, 그 아버지의 말씀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늘의 뜻 곧 그 창조목적을 감당하게 하셔서 우리의 죄(채무)를 없게 하시며,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아들 삼으시기 위하여 인생을 만드신 목적과 다르게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여기지 않게 하시고, 또한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생각하지 않게 하시며, 세상의 본질과 형식을 구분하지 못하는 시험에서 이기며, 연약한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없다는 악한 생각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나라, 그 나라가 곧 교회이며 그 나라의 영광과 권세가 생명관계로 만난 하나님, 곧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의 나라를 ‘죽어서 가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라이 임하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율법과 복음은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눅 16:16)” 말씀하시므로 예수님이 오심으로 살아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됨을 말씀 하셨다.

 

“율법과 복음은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눅 16:16)”

 

하지만 사람들이 살아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여기게 된 것은 <죽어서 가는 천당>이라는 표현 때문이다. 이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던 간에 천국에서의 삶은 다르다는 보편적인 동의를 이끌어낸 큰교회들의 가르침이 그 원인이기 때문이다. 큰교회들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것은 큰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라 여길만한 것이 그 안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두 가지인데, 먼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망상이 소유와 행위에 제약과 부족함이 없는 곳이라 여기기 때문에 육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현세의 큰교회 안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큰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교리 외에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야구선수가 프로선수로서 그라운드에서 경기를 하기 위해서는 이미 그 전에 야구선수이어야 한다. 그것은 그라운드에서 야구를 할 만한 이유가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법이 그러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그렇다는 것이다. 즉,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지 못한 사람은 죽어서도 하나님 나라를 갈수가 없다는 것이다. 뭔지를 알아야 갈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땅에서 꿈꾸었듯이 소유와 행위에 제약이 없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라 여겨 죽어서도 그런 나라를 찾아 간다면 필시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면서 살아본 사람이라야 죽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하신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의로 세운 나라에 합당한, 그 나라의 의가 내 의가 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셔서 나로 하여금 그 나라를 이 땅에 살면서 누리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그 나라는, 율법을 먹을 것으로 삼거나,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렸을 때 죽지 않으며, 보이는 것이라고 본질이라고 여기거나,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고 여기는 나라가 아니므로,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게 된 사람들이 모인 나라,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곳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된 인생들이 모인 곳, 즉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 나라의 권세와 영광은 잘 짜여진 조직과 예산에 권세가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한 아버지께 권세가 있는 것이지, 화려한 건물이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얼마나 모여있는가?’ 하는 것이나, ‘한 해 예산이 얼마냐?’ 라던가, ‘교인수가 얼마냐?’ 라던가, ‘신비한 일이 얼마나 일어나느냐?’에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 곧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 그것에 영광이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지금의 큰교회들은 주님 가르치신 기도의 극한의 반대편에 서 있다. 그 교회의 권세는 돈 많은 사람들이 모인 당회와 그들이 짜 놓은 예산과 조직 안에 있고, 영광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파이프 오르간이나,  수십억짜리 건물을 지어놓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그 영광 아래에 스스로 머리 조아리고 들어가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시험하던 그 마귀의 시험에 굴복한 것인지는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죽어서 가는 나라로 가르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모인 곳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칭할 수 없는 양심을 하나님이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건물이 좋아 질수록, 성가대 소리가 더 음악적 완성도가 높을수록, 교인수가 더 많을수록 영광스럽다고 여기는 신앙 안에는 아버지가 영광을 받고 권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더 짜여진 조직이 권세를 가지고, 더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권세를 가지고, 교인수가 더 많은 교회가 권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되는데 너는 안 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적어도 너에게 복음이 될 수 없다. better better 하는 것이 복음이라면 그렇지 못한 모든 것은 다 죄인이 된다. 그렇게 죄인 되는 그 기준으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은 <예수님이 되기에 나도 되는 복음> 바로 그것이다. ‘그 초라한 꼴로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냐?’며 예수님을 못 박은 유대인들의 관점 같이, ‘교인도 얼마 안 되는데 무슨 교회냐?’ 라고 하는 관점, ‘노래를 그 따위로 하면서 무슨 성가대냐?’ 하는 그 관점 아래서는 많은 사람이 죄인 될 수 밖에 없기에 그것은 예수님의 복음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의 큰교회들은 사회적으로 더 나아짐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며,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해도 그것을 책망하건만 전혀 돌이킬 생각이 없다. 그런 마음으로 주기도문을 교회 안에서 아무리 해 봤자, 그건 진정한 염불에 불과한 것이다. 아니 그저 주술과 주문에 가까운 것이다. 주님의 기도는 이 땅에 속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의를 자기의 의로 삼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교회를 이루어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늘 우리가 주님 가르치신 기도를 정말로 드리는 존재가 되려 한다면,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가 소유와 공로에 또한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는 생명 관계, 그리고 교회 조직체가 아니라 생명으로 이루어진 생명 공동체가 되게 하는 존재성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되도록 먼저는 내 안에 주님의 기도가 온전히 이루어짐으로 그런 사람들이 모였을 때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