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육신을 부끄러워하는 아담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가죽 옷을 입히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떤 동물의 가죽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 죽음 사람을 대신하는 제사의 원조로 볼 수 있고, 그 제사의 궁극은 예수님이시며, 그 예수님은 어린 양으로 표현하므로 일반적으로 양이라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이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감추기 위하여 다른 것을 희생하였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자기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어떤 육신이 소비되었다는 의미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는 어떤 육신이 소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사라는 것이 그렇고, 무엇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이 그렇다. 그러니까 구속과 십자가를 지는 것에는 육신의 소비가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이 어떤 목적으로 주어졌는지를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육신 가진 사람을 만드신 목적도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사람의 육신을 사용하시겠다는 것이다. 사용이 된다면 당연히 소비가 되는 것이다.


대속이 있다는 것은 대속물의 육신이 소비되었다는 것


그렇다면 예수님의 구속도 당연히 이러한 법에서 봐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말씀대로 오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들이 가진 육신의 존재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이유가 그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라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이라면 하나님께서 육신을 보는 관점도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지음 받은 사람을 보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는 것은 그 목적에 너무 적합하다고 생각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이 먹은 선악과는 육신을 다르게 보게 했다. 소비되도록 지으신 육신, 그래서 연약한 육신은 하나님께 부정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끄럽게 여겼다. 사람 안에 욕심이나, 정욕이 가득함이 하나님 앞에 부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게 여긴다는 것은 육신을 그렇게 지으신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다. 적어도 자신이 육신 가진 인생을 창조했다면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그 안에 있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은 그렇게 만드신 이를 비난하는 것 그 자체인 것이다. 아담이 자신이 만들지 않은 육신을 부끄러워했다는 것 역시 맥락이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로 볼 때 우리가 육신에 대하여 가지는 관점을 회복하는 기준은 십자가가 될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도 결국 육신의 모습이다. 육신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육신이 옥합과 같이 깨어지니 옥합에서 향기가 나듯 물과 피가 나온 것이다. 물과 피, 즉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도 자신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육신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존재로서 자신을 순종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육신의 가장 본질적 모습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시니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십자가를 진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구속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고(요 17장),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다.(마 17:5) 예수님께서 보이신 육신의 사용법을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것이라고 보셨다는 것이다. 즉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시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나는 그 모습 속의 육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기대하시고 목적하신 육신의 모습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육신을 보시는 관점대로 구현된 온전한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가장 온전한 형상으로 보신다. 찔리고 상할 때 그 안에 있는 것이 나오는 옥합과 같이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겠다는 의미다. 우리가 깨어질 때, 다시 말해서 육신이 소비될 때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도록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이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것은 육신이 하나님의 본성이 내재된 상태에서 살아가면서 자신을 종과 같이 섬기고, 세상의 가치 앞에 죄인이 되어도 자신을 소비해 가는 그것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뜻에 내 자신을 맡긴다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에 대하여 가지신 생각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육신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뜻이 본성이 되고, 그 본성이 육신을 DNA와 같이 이끄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육신을 보는 관점은 그것과 일치해야 한다. 육신 아니라 어떤 것도 존재의 목적에 순종하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목적과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그 상태로는 온전한 삶이 될 수 없다. 자기 정체성과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죄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하나님과 같은 관점으로 봐야 한다. 물론 이것은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질 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은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나의 육신은 너무나 적합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이 달라진, 거듭난 생명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자신의 육신이 자신이 믿고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너무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산다면 인생은 말 그대로 태어났다는 그 자체가 감사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상태가 된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지키지 않으려 해도 지키고 사는 사람이 된 것이다.


육신을 하나님과 같은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거듭났다는 의미이고, 인생 자체가 감사한 삶이 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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