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7. 12. 25. 07:53 Writer : 김홍덕

성탄절 아침이다. 이상하게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성탄절을 축하 한답시고 전날인 성탄 밤을 새며 진을 다 빼고서 정작 성탄절 아침에는 뭔가 허전한 기분으로 맞이하기 일쑤다. 한 편으로는 그 만큼 전날의 축제가 즐거웠다는 것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달력의 날짜가 모든 의미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해마다 성탄이면 이 성탄의 바른 의미를 새기자는 글을 쓰고 싶다. 이제는 많이 알려진 바와 같이 예수님의 나신 날이 12월 25일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 한다거나, 사는데 매몰되어 이웃을 돌아보지 못하는 것을 되돌아보자는 의미와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자 함은 아니다. 그런 것은 어젯밤 지칠 정도로 즐긴 보통의 교회에서 하는 말이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이 오신 날이다. 그래서 다들 자기 나름으로 들뜬 절기로 보낸다. 교회에 열심인 사람은 교회의 성탄 행사를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연인들은 서로에게 좋은 기억이 되고자 하며, 많은 봉사단체들은 예수님은 사랑이라며 불우한 이웃을 돕자고 수고한다. 그렇듯 같은 한 절기에 대하여 사람들이 절기를 지키는 것은 다양하다.


이렇듯 사람들이 다양한 성탄절을 보내는 것은 자기 마음에 있는 크리스마스의 이미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란 말은 메시아를 의미하는 ‘그리스도’와 축제라는 의미의 ‘마스’가 결합된 말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들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크리스마스를 보낸다는 것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삶의 메시아, 구세주가 다르다는 것이다. 모두가 힘들어하는 자기 삶의 구세주가 다들 다르다는 것이다.


연인들에게 오신 예수님은 서로의 사랑을 위하여 오신 것이고, 봉사단체에게 오신 예수님은 불우한 이웃을 돕는 예수로 오신 것이며,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복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여기는 교회에 오신 예수님은 말 그대로 세상의 성공을 위한 도깨비 방망이로 오신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뭐라고 미화시켜도 본질은 결국 그런 것이다.


당연히 예수님은 그런 의미로 우리에게 오신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형식적으로는 2,000여년 전 이 세상에 유대 땅에 오셨지만 그런 예수님은 사실 우리에게 의미 없다. 우리가 다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내 생일도 챙겨주는 이 별로 없는 세상에서 보지도 못한 사람, 그것도 사형수의 생일을 그렇게 기억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오신 이의 목적이 의미가 있지 않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셨다. 그것도 말 구유에. 유대 땅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땅이다. 자기 메시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아를 기다리는 땅이라는 것이다. 자기 삶의 문제를 해결해 줄 메시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메시아라는 것이다. 그리고 땅은 사람이다.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셨다고 하는 것은 자기 문제의 해결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오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자기 문제의 해결을 바라는 사람들, 자기 안에 있는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축제가 아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성령으로 생명이 된 사람들의 축제다. 성탄이란 다름이 아니라 자기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는 탄생의 축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의미가 된 것이 기쁨인 사람들의 축제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일반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세상이 몇 천년 동안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는 대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게으름뱅이나 무능력자가 아니다. 오늘 많은 어리석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이 세상을 바로 잡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기도의 범위가 넓고 고상한 신앙 같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하나님! 당신은 당신이 만든 세상을 이 따위로 경영하십니까?’라고 항의하는 사람일 뿐이다.


이 세상이 오늘도 돌아 간다는 것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의 의도하신 일이 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목적이 오늘도 성취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그냥 두실 이유가 없다. 하나님에 대한 그 정도의 신뢰도 없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온전한 것은 어떤 것인가? 아무리 봐도 난리 법석이고 모순과 전쟁과 시기와 분쟁이 넘쳐나는 세계인데. 바로 여기에 성탄의 비밀이 있다. 앞서 이야기한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목적이 되는 사람들이 오늘도 태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성탄, 한 개인이 하나님의 의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나는 일들이 아직은 있다는 것이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다. 그 목적대로 성탄이 계속 있기 때문에 세상이 아직 멸망하지 않은 것이다. 12월 25일로 다가온 성탄이 아니라 자기 존재가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성탄이 아직도 하나님께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으실 정도로 늘 있다는 것이다. 자기 마음에 예수님이 오셔서 거듭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즉 온전한 성탄을 누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탄은 사람들 각자가 자기가 옳다고 여기고 바라는 일들을 소망하는 날이 아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사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천부께서 다 아시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다만 사람들의 눈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로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는 버리고 예수님께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날을 성탄이라며 즐기는 것이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안목으로 성탄절을 보듯 성탄의 소망도, 자기에게 오신 예수님도 다 자기 눈에 본질로 보이는 세상의 것에 대한 일로 바라본다.


하지만 성탄, 곧 예수님은 하나님을 바라는 소망,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을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들에게 오신 아주 개별적인 사건이다. 성탄절은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그 즐거움을 나누는 절기인 것이다. 육신의 소망을 바라는 절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인생들에게 예수님을 보내셔서 사람을 만드실 때 가지신 목적과 뜻과 의미를 알게 하셨다.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이다. 


그 구원의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의와 뜻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탄생하는 날이 바로 성탄절인 것이다. 간절하게 그것을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오셨다는 것이 바로 유대 땅에 베들레헴(밥 집)에 오셨다는 말씀의 본질이다. 밥 집에 오셨다는 것은 배고프고 간절하다는 의미인 것은 덤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하나님의 말씀과 달리 자기의 소망을 바라는 이들의 모든 바램은 하나님 입장에서는 다 죄악이고 유흥일 뿐인 것이다.


이제 다들 인생에서 또 하나의 성탄절이 지나가고 있다. 그렇게 많은 성탄절들이지만 아직도 내가 왜 사는지 의미를 모른다거나, 자신이 죽을 때 가져갈 수 없는 것에 인생의 목적을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다. 오히려 그들의 방식으로 보낸 성탄절은 하나 같이 하나님의 의를 벗어난 죄악일 뿐이다. 세상의 성탄절은 말할 것도 없고,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교회에서 보낸 성탄절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을 보내면서 정말로 자신이 유대 땅에 있는 밥집과 같은 심령을 가졌는지를 봐야한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그 뜻을 간절히 기다리는 심령인지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존재로 살면서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상태보다 더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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