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은 욥의 고난이라는 것이 그저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시는 일부이고, 하나님의 질문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경영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에 불과한 것이냐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만만하게 보일 수 있는 그 일 하나를 사람이 못합니다. 그것을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 가서 세상의 성공과 육신의 평안을 기도하는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모든 스포츠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몸에 힘을 빼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잘하려고 몸에 힘을 주면 몸이 굳어져서 제 기량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운동선수, 아니 아마추어 동호회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도 다 아는 몸에 힘을 빼는 그 하나가 안 되어서 기량이 늘지 않고 발휘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성경을 가지고 씨름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은 철저히 믿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주라는 그 하나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온전히 은혜로 경영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사람들에게 몸을 맡기고 뛰어 내리는 사람들과 같이 충분히 살 수 있을 것인데, 살아가면서 각종 문제들 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께서 삶의 전반을 경영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교회에서 아니면 집에서 기도하는 내용을 돌아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나라와 세상 걱정을 하고, 삶의 파편들을 하나씩 하나님께 해결을 바라며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 좋은 믿음인 것 같지만 솔직하게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맡겼다면 ‘하나님께 맡긴다.’는 기도나 다짐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삶에서 일어나는 각종 일들 하나하나를 하나님께 기도하여 해결하려고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맡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하고 완벽한 착각이며 불신입니다. 전투만 이기려하고 전쟁의 결과는 생각지 않는 바보 같은 지휘관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삶을 세상을 살기에 적합하게 주셨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가진 육신의 역량과 사회와 세상의 제도와 법질서 안에서 살고 있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그렇게 살면 되는데 살아가는 문제까지 일일이 하나님께 맡긴다면서 기도하고 그것으로 안 되면 돈 싸들고 기도원이나 목사에게 가서 기도해 달라고 하는 이런 망나니 같은 짓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생을 경영하시는 것을 믿지 않는 증거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 살아가는 순간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 또 무엇을 할 것인지와 같은 것은 하나님께 물어볼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사사건건 하나님과 다투는 것입니다. 정말로 알아야 하는 것은 왜 이 삶을 주셨는지에 대한 목적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살게 하셨다면 온전히 경영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순종하는 그 하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욥은 고난에 대하여 인생의 고난이라는 삶의 한 파편을 가지고 하나님께 이유를 알고자 했습니다. 요즘 말로 큰 그림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고난은 심각한 문제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온전히 세상을 그리고 욥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고자 하시는 경영에 수반된 한 과정에 불과한 것인데 욥은 그것을 아는 것에 인생을 걸고서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나님께 항변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욥이 참 신앙 없는 사람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사실 더합니다. 아니 욥에게 비할 바도 못됩니다. 욥은 비록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듯 대든 것 같아 보여도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어떠함을 가지고 의로 삼거나 그것을 복으로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정도는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시살 ‘그 정도’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매개는 육신의 문제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욥이 볼 때 고난이라는 한 명제는 자신에게 참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괜히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큰 그림이 안 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문들은 하나님께서 말 그대로 세상을 온전히 경영하고 있다는 것을 욥에게 분명하게 각인을 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영은 언제나 온전한 것이며, 그 경영 아래 있는 피조물들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늘도 하나님께 자기 삶의 문제를 기도하고 의지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공부해서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온전히 경영하시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 그런 신앙,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 답답함은 정말로 말할 길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한 번도 웃으셨다고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될 지경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면 자기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경영에 속한 것임을 알고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될 대로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존 본능을 주셨으니 물에 빠지면 살려고 하고, 성인이 되어 사회에서 경제활동이 요구되면 치열하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고 그것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서 어떻게 하면 물에 빠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빠지면 수영하지 않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하고, 육신이 평안하면 교회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회 칠한 무던 속의 생각은 어떻게든 경제생활을 편하게 하면서 돈을 벌까 궁리하면서 그 각각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순종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고 하심이 바로 이런 사람들의 생각에 응하시지 않겠다는 것인데 말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육신으로 살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삶의 작은 파편들 하나하나를 하나님께 의지하며 이겨가는 것을 신앙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것이며 믿지도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문들을 듣고서 욥이 이전에 알지 못한 것을 말하였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한 결 같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피조물 최대의 영광인 목적대로 사용되는 생명과 빛으로 인도하시고 그 안(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바라시고 인도하시는데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겪는 일들을 해결하려고 하나님께 기도하니 이것이 바로 진정한 불신과 어두움과 생명 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욥이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청조 목적을 모르는 삶이라는 것은 재와 티끌과 같은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수많은 질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창조하신 목적대로 온전히 경영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심이고, 그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우리가 겪는 고난이나 또 모든 일상들은 그 하나님의 경영하심에 수반된 것임을 알게 될 것이고, 살아가는 모든 순간 하나님께서 자신을 경영하시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니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 되며, 항상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이니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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