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고난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경영하시는 하나의 방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사람을 단련시키거나, 아니면 큰 복을 주시기 위하여 그 자격을 갖추는 과정으로서 고난을 사용하시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이 생각은 사실 욥의 친구들이나 욥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세 친구는 하나님께 죄를 지은 이유로 인하여 그 죄를 돌이키도록 사람을 각성시키기 위하여 고난을 주신다고 생각을 한 반면, 욥은 도무지 그 이유가 있을 것인데 알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고난 자체가 어떤 목적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후의 말에서 고난은 그 자체가 어떤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경영하시는 과정에서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나 바울 사도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시지 않는다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사람이 겪는 모든 일은 그 존재의 목적 범주 안에 있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성경 한 권의 이야기를 가지고 주제로 부각된 논제를 정하여 이야기하다보면 신앙이라는 것이 다양한 분야에서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성경은 보기에 66권의 책이 엮여져 있지만 사실은 한 권의 책이고 무엇보다 주제 역시 하나인 책이기 때문에 그 주제를 알고서 보면 모든 성경이 청색실과 홍색실과 자색실이 잘 엮어져서 제사장의 옷이 되는 것과 같이 성경이 속사람 안에서 엮이고 이해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그것으로 모자라서 아들을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전하고자 하신 것은 우리 인생들의 존재 목적 그 하나입니다. 인생이 존재의 목적을 하나님에게서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신 조물주로 인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알고자 하는 것이 신앙의 모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부르신 것은 아버지는 아들의 의를 가진 분이고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그 뜻이 흙으로 지어진 우리 자신에게 임하여서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죽음과 죄의 자리에서 떠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할 유일한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유일한 것입니다.


이 하나를 안다면,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가지고 계시고, 그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며, 어떻게든 그것을 사람에게 알게 하시고자 하시며, 그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며, 존재의 목적을 아는 생명을 가진 자가 되는 밝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안다면 최소한 성경의 어떤 말씀이라도 어떤 이유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말씀하시는지는 알고 성경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존재 목적의 세계에서 만나고 알게 되면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에 일어나는 일들, 사람들이 그렇게 그 각각의 일들과 다투어 이기려 하고 원인을 알려고 하는 그 모든 것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맹인이 눈을 뜨는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존재의 목적을 알면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하여 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 뜬 사람이 보지 못하여 몸이 상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고난이라고 여겼던 것들(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그렇게 여기는 것)이 사실은 고난 자체가 하나님이 의도한 것이거나 고난을 매개로 하여 다른 목적을 이루시려고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려고, 그러니까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시고 또 목적대로 경영하시는 일련의 일들일 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난을 이긴 것입니다. 고난을 이겼다는 것은 고난과 다투지 않는 것입니다. 삶을 고난이나 곤고한 것으로 여기는 삶, 죽어서 천국 가서 평안을 누리겠다는 생각하는 이면에 깔린 이생의 곤고함과 매일 싸우는 사람은 고난을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고난이라 여기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목적대로 경영하심 아래 있다는 증거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다투는 것을 그칠 수 있어야 비로소 고난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다투다가 이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환도 뼈가 부러지고 나니 오히려 그 이름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의미의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시겠다고 하신 것도 이것을 말씀하심이며,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게 하는 의와 다투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장하는 것에 육신을 내어 주심으로 고난을 이기셨다고 하심이 이것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아울러 바울 사도가 우리가 육신의 장막에 거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라 덧입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신앙의 한 과제로 볼 것이 아닙니다. 좀 쉬게 설명한다면 표현이 좀 어색하긴 해도 하나님의 경영에 육신의 소비를 불가피한 것이고 그 소비되는 과정을 우리가 이때껏 고난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시험을 받는 것은 욕심에 이끌린 것일 뿐 하나님은 시험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욕심은 다름 아닌 육신을 소비하지 않고 평안히 하나님을 믿고자 하고 그것을 복과 영광으로 아는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스스로를 고난에 처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라마단이나 중이나 수녀나 신부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은 물론이고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일을 자신이 하는 것이므로 겸손하고 수도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오히려 인간 타락의 원조인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경영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육신이 소비되는 것이지 사람이 나서서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변론하겠느냐는 것이 바로 같은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이란 우리에게 존재의 목적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우리의 삶이란, 또 고난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신 대로 경영하심을 인하여 우리가 겪는 일의 일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수 많은 질문을 욥에게 하시는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경영하심으로 나타나고 보이게 되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그 질문들을 통하여 자신에게 임한 고난이라는 것이 고난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경영 속에 있는 일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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