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는 욥의 고난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그 고난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 원하셔서 주신 성경입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준으로 고난을 해석하라는 의미는 당연히 아닙니다. 인생이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고난이라 여기며 욥기를 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설사 사람들이 가진 뜻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인생이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하나님께서 목적이 있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신 목적대로 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이 있다면 인생들은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섭리에 대하여 사람들이 인권이나 생명의 존엄성과 같은 것을 들먹이면서 그럴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을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더 그럴 것입니다. “신이 뭔데 인생을 이래라 저래라 한다는 거냐?”라는 식의 반항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망각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의 뜻이나 공로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시작하지도 않고, 자신의 소유로 시작한 것도 아닌데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고 존재의 목적마저 자가발전처럼 자신이 정한다는 것이 전혀 합당한 것이 아닌데 그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동차가 운전자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자기 뜻대로 움직이면 우리는 “이것이 미쳤나? 자기 맘 대로네?”라고 하는 것을 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하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면 인생이 겪는 고난에 대하여 전면적인 재해석이 수반됩니다. 욥기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이 볼 때 인권도, 존엄성도 보장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인생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하고 감사하며 기쁜 일이라는 것을 알기까지의 과정이 바로 욥의 고난입니다.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자신의 인생에 관여하는 것은 무조건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단 한 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고, 또 무엇보다 왜 다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욥기에 흐르는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이끄시는 과정에 수반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경영하시는 과정이라는 것은 사람이 보기에는 그 가치도 다를 수 있고, 사람의 존엄성이나 주권과 같은 것이 무시되는 것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존재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존재하는 목적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브레이크는 큰 마찰과 그로 인한 열을 발생시키면서 자신이 소모되는 것이 일생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이 바로 가장 영광스러운 것인 것과 같습니다.


욥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바로 안다는 것은 인생에게 평안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행여 그것이 아니었다고 쳐도 적어도 그것은 고통이나 고난이나 곤고함은 없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이 블로그 욥기에서 많이 강조한 바와 같이 욥의 과정에 들어서서 보면 정말로 그 생각이 듭니다.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빌고 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올바른 모습이 아님을 안다는 것은 정말로 하나님 앞에 귀한 것을 발견한 것을 알게 된 것임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목적에 부합되어야 합니다. 금으로 축구화를 만들면 귀한 것일까? 그것이 아닙니다. 금으로 식칼을 만든다면 요리가 불가능합니다. 그와 같이 존재는 그 목적에서 가치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되게 살아가느냐가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지 인생의 모양이 세상에서 편하고 대접받고 손에 물 묻히지 않고 사는 것이 귀하고 영광스러우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도 그렇고 그의 제자들과 사도들의 삶을 생각해보면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고, 또 기도했던 것과 전혀 다른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그들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든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들은 우리가 간절히 피하고 싶은 일들을 몸소 감당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고난과 핍박은 물론이고 목숨도 다 내어 놓았습니다. 


또 우리가 깊이 생각하지 않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일, 흔히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하는 일을 위하여 몸을 소비했습니다. 사람들을 오라하지 않고 자신들이 갔고, 옥에 갇히고 발을 씻기며 섬겼습니다. 그렇듯 하나님께서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아는 그 존귀함은 세상에서 볼 때는 너무 천하고 외면 받고 죽임을 당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알았는데 그것이 별다른 가치가 없다는 것에서 느끼는 갈등, 욥과 같이 진정한 하나님의 정체성을 알았고,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자랑할 정도의 자리에 이르렀지만 정작 달라지는 것은 없고, 오히려 인생이 여상할 뿐 아니라 모두가 평안을 꿈꿀 때 육신이 욥과 같이 곤고한 세월을 보내게 되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욥이 그랬듯, 하나님께 세상의 성공과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육신의 문제에 대하여 의지할 곳을 잃은 기분이 듭니다. ‘이전에는 기도라도 하면 최소한 마음이라도 위로되었는데…’라는 생각, ‘이렇게 귀한 복음을 알고 있는데 실수하시는 셈 치고 복음 전하기 편한 삶을 좀 주시면 안 될까?’ 같은 소망들이 마음에 들면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겪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고난의 시간들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의 시간들을 지나노라면 놀랍게도 하나님의 주권이 자기 안에서 너무 분명해집니다. 욥이 하나님께 받은 질문은 형식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 과정을 겪은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이 하나씩 보인다는 것을. 정치, 경제와 같은 문제들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경영에 속한 것임이 보이고, 우리가 하나님께 세상일 잘못되었다고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인지도 분명히 보았을 것이고 또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질문들이 자기에게 들린 사람은 정말로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경영 아래에 있으므로 세상이 잘못된 것은 전혀 없고, 오직 잘못된 것은 자신의 안목 그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세상은 이래야지.’라는 그 하나로 인하여 세상의 모든 것은 다 그릇된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욥에게 물으시듯 자기 눈앞에 펼쳐진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될수록 세상은 아름답고, 또 무엇보다 인생에서 겪는 곤고함과 수고함이 은혜롭고 영광스러운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 지경에 이르면 비로소 태어나지 않음보다 태어나서 살고 있음이 더 감사하고 놀라운 은혜라는 고백이 끊이질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며,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않는 인생이 되었음을 스스로 알 것입니다. 성령이 증거 하실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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