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후반에 나오는 하나님이 욥에게 하시는 질문에 대한 가장 큰 고찰 포인트는 왜 그 질문을 하셨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을 자랑하는 것에서 시작된 욥의 고난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사탄이 욥에게 고난을 가하는 것을 허락하신 이유를 설명하셔야할 것 같은 시점인데 그런 해답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을 퍼붓고 있다는 것이 가장 의아한 점이고, 그렇기 오늘날 성경 욥기를 읽는 이들이 가장 관심을 가져야할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또 욥은 이 질문들을 받고서 자신을 회개합니다. 이전에 하나님을 무지한 말로 헤아렸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한 수 많은 질문들 어느 하나에도 답하지 못했는데 깨달았다는 것도 심히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유를 안다면 어쩌면 욥기의 말씀이 의도하는 바를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문들은 소위 말하는 삼라만상의 것들입니다. 그것들이 왜 그런 모양과 능력과 본성을 가졌는지를 아느냐고 물으시고 있습니다. 그 내용들은 사실 오늘날의 과학으로도 대부분 모르는 것입니다. 화학적으로 모든 원소는 원자와 전자로 이루어졌고, 전자는 궤도별로 2개 4개 등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렇게 말고 다르게는 안 되는 이유는 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하시면서 그 질문 자체에 대한 답을 바라시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 하나하나의 의미를 알면 좋겠지만 행간을 보고 목적을 아는 것이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신 질문들 뒤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온전하게 경영하고 계시다는 것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질문 속에 언급된 그 어떤 것도 피조물이 그렇게 기획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다 창조하실 때에 ‘있으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고 한 것들입니다.


욥이 당한 고난은 단순하게 육신의 모든 것을 잃고 육신마저 병든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욥의 한탄에서도 그것을 크게 한탄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처지라는 것을 언급하지만 그것은 한 마디로 이전에는 잘 나가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어린 것들이 자신을 멸시한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같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게 같아 보이면 육신의 평안이 하나님의 복이라는 사탄의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있음에도 삶이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세 친구들이 그렇게 행위의 범죄로 인하여 육신이 곤고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반적인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너무 합리적인 주자 앞에서 굴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분명함은 누누이 언급한 바와 같이 욥의 과정에 이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욥의 과정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는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 곧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위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바라시는 것임을 알게 되는 자리에 가서 보면 마치 욥기 시작에 욥이 등장할 때 온전하고 부유한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하듯 정말로 기쁘고 이때까지 자신이 하나님을 알아 온 모든 것이 다 새롭게 보이며 세상 부유한 사람임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내 그 기쁨,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행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 온전하고 귀한 것임에도 육신의 삶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 것에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이 과정은 정말로 신앙의 여정에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이 과정을 모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고 했을 때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엠마오로 도망가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으며, 요단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왔는데 왜 사사들의 시대가 있어 이방인들의 침략을 받으면서 우리도 남들처럼 왕을 달라고 부르짖었는지를 알 수 없고, 바울 사도는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는데 왜 또 광야에 머물러야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을 학문적으로 공부하고, 그 공부한 자격으로 설교하는 자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높은 곳에서 떠들고, 그 외침에 의지하여 육신의 평안을 하나님께 구하는 사람들은 욥기도 사사기도 예수님의 십자가도 다 아는 것 같지만 그것은 다 노릇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욥에게 하나님께서 이 무한한 질문을 하시는 이유도 자기 안에 분명히 밝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너무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이것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좀 더 알아 가면 그것을 인하여 자신이 귀해지는 것을 알아 갑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아는 만큼, 또 그 귀함을 아는 만큼 세상의 삶이 귀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큰 갈등입니다.


그렇다보니 많은 신앙인들이 여기서 큰 오판을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세상에서 대접을 받으려 합니다. 아니 그래야 될 것처럼 여깁니다. 대접은 아니라도 하나님을 바로 알고 살아가면 세상의 문제가 자라 풀리고 같은 조건이라면 항상 자신이 좋은 것이 당첨되어야 할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실상은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심을 알고 사람의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심을 아는 욥이 오히려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라고, 하나님 모른다면서 핍박을 받는 것과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인데 그 귀한 것의 실체를 알고 보니 세상에서 가장천한 자리로 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그것을 담은 육신이 세상에서 대접은 받지 않더라도 최소한 자기 삶은 영위할 것 같은데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평안해지겠다면서 주장하는 선악과를 먹은 주장과 의로움 앞에 육신을 더 소비하는 종과 같이 되는 것이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정작 그 아들의 아들 됨은 다른 자리가 아닌 말구유며 또 흉악범을 처형하는 형틀인 십자가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가면서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육신이 자기의 평안을 추구하면서 살아왔고, 또 하나님을 알면 오히려 귀해질 것 같은 그 육신의 삶이 십자가로 끌려가는 것이라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 되기까지 사람이 겪는 갈등과 곤고함과 때로 배신감과 자괴감이 바로 욥이 당한 고난인 것입니다.


그 욥이 하나님께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항변한 것은 하나님을 알아도 별 것 없는 것이 아니냐는 항의와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후가 때로는 사람을 아프시게 하신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인생을 경영하시는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욥에게 질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도는 사람들의 보기에는 어떤 것은 사납고 어떤 것은 놀라울 것 같아도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경영하심이라는 것을 알면 욥의 그 괴로움과 고난이 그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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