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질문을 촉발한 욥의 여정 – 2


욥의 고난은 적어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지 않는 분이시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하나님께 무엇을 할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될 것이냐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아라 수 있는 과정입니다. 물론 고난이라는 것이 특별히 차별화되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고난의 의미를 바로 알려고 한다면 욥의 고난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아야하기 때문입니다ㅣ.


늘 언급하는 바와 같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인생을 고난의 연속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생이라는 것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음을 인한 갈등과 곤고함을 인함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맘대로 되는 일을 고난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뜻하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이루기가지 고난이 많았다는 말 역시 뜻하는 것이 자기 마음의 생각과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욥에게 “너의 범죄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고난을 당하게 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고난을 당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소망이며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며 복이고 선하고 의로운 것이라는 배경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경영 안에 고난이 있을 수 있다는 정도만 알았더라도 욥이 “너희의 말은 나를 괴롭히는 것”이라고 할 정도까지 말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서 얻고자 하는 것에서 가장 큰 것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는 삶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하나님의 생각을 바꾸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뜻 기특하고 힘들고 고상한 도전 같지만 그것도 무식한 짓이기는 매 한 가지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 뜻하신 바를 육신을 가진 인생을 주심으로 표현하셨는데 주신 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다른 것을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이 고난을 당한 자리는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고난으로 여기는 자리가 아닙니다. 당연히 인생이라는 것이 성경을 행위로 지켜서 그 보답으로 육신의 평안을 보장 받고자 함도 아닙니다. 또한 육신의 평안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며 선이고 의로움이라고 여기는 자리가 아닙니다. 욥이 고난을 당한 자리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님을 알고서 보니 그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지 모르는 자리이고, 그렇게 귀한 하나님을 알았으면 삶이 달라져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갈등을 겪는 자리입니다. 그것이 욥이 당한 고난의 본질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괜히 고난을 주시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바라는 복을 주시기 위해서 그 사람이 합당한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 보실 목적으로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과, 무엇보다 육신의 곤고함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 수행에 수반된 과정을 사람이 곤고하게 느끼는 것일 뿐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욥이 고난을 겪고 하나님의 의를 알아가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지 않는다는 것의 원천적인 의미를 알아야 하고, 다음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가진 인생을 주신 의미를 알게 하시려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이견이 있으면 욥의 고난은 한낱 더 큰 육신의 복을 받기 위한 테스트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의의 판단 기준으로 삼으시는 분이라 믿는 세계에 속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것은 욥의 고난을 이해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생을 바라보는 안목의 회복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하나님을 믿으면 육신의 평안이 담보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육신은 절대적인 소비재입니다. 존재 했던 모든 인생들이 다 하나님의 뜻 아래 다 소비되었습니다.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 에녹과 엘리야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에 소비된 것이 육신이 보존되는 것을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그 육신이 보존되고, 그 육신의 한계를 뛰어 넘고, 마음이나 생각이 원하는 대로 육신을 평안하게 하고 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이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육신을 십자가에 드려 소비하므로 하나님 아들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보이신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육신을 소비하여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존재라는 것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우리가 육신으로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고난, 물론 그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볼 때 고난인 그 곤고함이라는 것은 벌도 아니고 테스트도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소비되어가는 것이 기쁨이고 즐거움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어지간한 사람의 안목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거듭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욥기의 내용은 거듭난 사람이 자신의 거듭난 삶에 대하여 인식해 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귀한 의를 알았는데 이상하게 그것을 알면 귀해질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그 알 수 없음이 하나님께 원망이 되기도 하고, 한 편으로 육신의 삶은 또 곤고해지는 그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의 갈등이 바로 욥이 겪은 갈등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육신의 삶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고난과 불의로 여기기에 육신이 곤고하게 되지 않기 위하여 육신으로 성경을 지켜내려는 신앙의 여정에서 욥기를 보면서 육신의 고난을 이겨내면 하나님께서 육신의 삶에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욥기와 무관한 자기만의 생각일 뿐 하나님께서 욥기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과는 완전 동떨어진 신앙인 것입니다. 아울러 죽어서 천국에 가면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받을 것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기에 의미 없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알 수 없는 질문들을 받은 것은 일면 욥이 그것을 질문으로 들을만한 여정을 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시는 질문이 의미가 있으려면 적어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신약이든 구약이든 무관하게 행위로 성경을 지킴으로 육신의 고난이라는 불의한 일을 겪지 않아야 복 받은 것이라 생각하는 과정은 지나야 온전한 의미를 알 수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야 답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질문 속에서 알지 못했던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자신이 겪어온 여정에 맞게 순종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에 따라 경영하시는 뜻대로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인생의 여정을 살아가는 사람, 그래서 그 과정에서 겪는 인생의 소비가 고난이 아니라 은혜인 것을 알아가는 사람들은 그 생명의 장성함에 따라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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