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신다는 말씀에 이어서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고 하고 있다. 이 말씀을 잘 생각해보면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참으로 성경은 앞뒤가 잘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사도 요한의 말씀하시는 바가 이렇게도 같다는 것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서 보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형제가 사망에 이르는 죄 구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구하는 것이 기도인지 다시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 사도의 말씀 중에 사람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고 그렇지 않고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 구하라고 하고 사망에 이르는 죄 범하는 것에 대하여는 구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이 있다면, 요한 사도가 요한일서를 기록하면서 보여준 디테일이 여기서는 좀 약하다는 점이다. 아주 상세하게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하여 설명해 온 것에 비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사항에 대하여 상세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 좀 의아하긴 하다.

(사실 이러한 말씀은 신학적 고찰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학이 없으면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형제>이다. 사람이 사망에 이르는 죄에 빠지고 그렇지 않고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그럴 때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하여 요한 사도가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형제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아버지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 무엇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고 정체성이라는 것을 고백한 사람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서로에게 형제가 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이 있고, 사회적으로 또한 나라의 법이나 회사의 규칙과 같은 것에 명시된 죄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 죄는 모든 것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그 안에 있으면 아무리 세상의 법을 잘 지키고 법 없이 살 사람이라 여겨져도 죄인이다. 그것은 멋있는 차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해적 사회에서 아무리 법을 잘 지켜도 나라에 투항하지 않은 상태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은 어떤 범죄들을 보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형제라 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어떤 죄 범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상실되지 않은 상태에서 범하는 어떤 범죄에 대하여는 하나님께 간구하라는 의미이다. 이는 형제라 할 수 있는 정체성이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사망에 이르는 죄는 형제라는 범주를 벗어나는 상태에 있는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누구하나 예외 없이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그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인가 싶겠지만,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형제라고 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가 그것을 버리고 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있던 사람이 이를 버리고 이를 부인하는 것이 바로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에 앞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이렇듯 용서 받지 못하는 죄와 같이 그것에 절대로 빠지면 안 되는 자리에 대하여 성경이 말씀을 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로 가야할지 염려만 하는 자리에서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유의 대표가 어쩌면 <예정론>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예정했다면 다 된 것이지 사람이 할 것이 있냐 하는 생각과 같은 것이다.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했다면 이미 종친 것인데 더 이상 세상 선하게 살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생각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좀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예정론이라는 것이 자신이 예정되었는지 아닌지를 가늠하라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삶을 살게 된 사람이 자신의 여정을 돌아볼 때 하나님께 그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는 고백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간구도 체휼도 없는 사람이 '나는 예정되었을까?' 고민하는 것이 예정론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모든 경륜은 모든 사람, 오고 가는 모든 역사 속의 어떤 사람이라도 다 하나님께서 허투루 지은 사람이 없고, 어떤 생명이라도 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지은 사람이기에 모든 사람은 다 예정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이것을 부정하겠는가?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을 믿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예정되었는지 아닌지를 고민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을 따라 맘대로 사는 것이다. 이런 것을 예정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있다. 그 경륜 안에 들어 간 사람은 돌아보면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예정하심 안에 있었다고 말하고 고백하고 예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망에 이르는 죄, 사함 받지 못하는 죄, 성령을 훼방하는 죄도 사망에 이르지 않는 삶, 죄 사함 받고 구원 받은 삶, 성령의 감동으로 사는 삶 안에서 보면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지, 그렇게 살아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고민일 뿐이다.


그런 것을 잘 알 수 있는 비유가 바로 달란트 비유라 할 수 있다. 주인이 어떤 사람이라 스스로 규정한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예정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예정론을 논하고, 죄 사함을 받지 못했는데 사함 받지 못하는 죄를 고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것을 알고 이 사도 요한의 말씀을 보면 이해가 될 수 있다. 또 이것을 디테일하게 설명하지 않은 것 역시 알 수 있다. 생명이 있고, 형제라 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 굳이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구하는 것인지도 알고, 형제가 무엇인지 안다면 어떤 것이 사망에 이르는 것인지 아닌지를 본능처럼 안다는 것이다. 그것을 굳이 설명하자면, 형제라 할 수 있는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고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버렸느냐?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의 정체성에 관해서 말이다.


죄와 사함에 관해서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면 모든 죄를 사하신다는 대 전제가 기본이다. 다시 말해서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는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굳이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면 이것을 알고도 여기서 떠나는 것 그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을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맛본 사람은 그것을 버리지 않는다. 개로 태어난 강아지가 세월 보내면서 고양이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서 그것을 버리고 스스로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데 그것이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의 주가 되시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래서 이어 나오는 5장 18절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안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곧 형제라 할 수 있는 사람들,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영생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범죄치 않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해 보지 않고 어떤 것이 사망에 이르는 죄인지, 예정된 것이 무엇인지 궁리하는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그것을 스스로 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망에 이르는 죄와 그렇지 않은 죄는 머리로 연구하고 신학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인지를 연구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믿고 그 뜻 안에 순종한 사람은 사망에 이르지도 않고 자신이 예정되었다는 것도 알고, 또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인지도 알고, 무엇을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지도 알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도 아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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