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하나님께 많은 기도를 한다. 성경에서는 구하면 주신다는 말씀이 많다. 하지만 앞뒤 정황을 잘 살펴보면 <그의 뜻대로>, <내 이름으로>와 같은 조건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말씀들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은 들어주시는 구조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의 절대적인 요소로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사람은 그릇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채워 주소서'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사람이 담아내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기본적인 관계라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많다.


이러한 표현이 함축된 말씀이 바로 <순종>이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것은 아주 수동적인 것이라는 것 역시 신앙을 깊이 상고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고, 또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시작한 것이 아니기에 삶의 어느 한 절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서는 말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많은 기도를 한다. 밥 달라, 배우자 달라, 돈 달라, 명예를 달라면서 말이다. 그런 것이 없어서 삶이 힘드니 곤고함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런 것이 잘 갖추어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서 달라고 한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좌지우지 하면 <쿼바디스>같은 영화를 찍는 사람도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하면 들으신다고 생각한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육신의 문제, 돈이나 배우자, 명예나 합격과 같은 것을 들어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기도하면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그런 것이 왜 하나님의 주요 관심사가 아닌가 하면 단편적으로 봐도 예수님께서 그런 것을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기도 하지만, 정말로 생각해보면 그런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다 얻을 수 있도록 사람에게 육신을 주실 때 이미 함께 주신 만물과 사회의 규칙으로 주셔서 그 안에 맞게 살면 다 얻을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5-28)


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름은 생명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름은 생물학적으로 봐도 생명의 특성을 규정하는 이름을 말한다. 기린, 코끼리와 같은 이름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 안에서 구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3-15)


요한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신다는 말씀 역시 이 안에 있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뜻은 삶의 어떤 선택에 있어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궁금해 하는 그런 뜻이 아니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는 어쩌면 한 가지로 모을 수 있다. 하나님께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 답이 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생명으로, 그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필요한 재화와 용역에 대한 아쉬움을 떨칠 수 없고,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자기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로 다가오기도 한다. 정말로 돈이 궁한 사람에게 재벌 갑부의 자리는 갈 수 없는 소위 말하는 넘사벽이다. 그러면 이것은 사람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신께 기도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그럴 때 양심상(?) 재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는다. 그저 자신의 궁함을 벗을 정도의 해결을 바라면서 자신은 겸손하고 양심적이라는 생각까지 덧붙인다. 하지만 그건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돈에 관해서는 어떤 사회든 그것을 버는 법이 있다. 그것에 순종하면 된다. 물론 그 법 안에는 잘 벌리는 것과 망하는 것이 공존한다. 그런 양면성이 공존한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더 부자가 된다. 망하는 것을 겁을 낸다는 것은, 망하는 것은 나쁜 것이고, 악한 것이며, 자신에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선악 간에 판단하는 기준이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사회에 속해서 살면서 사회가 가진 양면성 중에 자신에게 유익한 단면만이 선이고, 자신에게 일어나야 하며, 반대인 면은 나쁜 것이기에 자신에게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선악과를 먹은 마음의 상태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마음, 선악과의 관점을 벗은 눈으로 세상을 살면, 그야말로 부유함에도 궁핍함에도 거할 수 있는 세계 안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순종을 아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그에게 이루어진 것이다.


망할 만하면 망하고 죽을 만하면 죽는 것이 인생이다. 자신이 사회의 일원으로, 아니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을 가지고 살도록 하신 뜻을 알고 그 삶에 순종하는 사람은 사회의 법으로 열심히 살고 그러함에도 부유해지지 못했을 때 순종하고 사는 믿음이 있는 삶을 산다. (이것은 필자 역시 보고 체휼한 바이기에 확신하는 바이다.)


물론 그런 순종이 있다고 삶이 곤고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곤고함이 자신이 육신을 가진 삶이라는 것을 일깨우고, 또한 그런 것이 어우러져 이 육신을 가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고, 또한 사람들에게 세상에 속한 이 육신을 가진 삶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표현해 가는 삶에 더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모습, 열심히 살아도 세상이 바뀌지 않으니 '법 바꾸자', '정치 잘해라' 외치거나 구국 기도회를 하는 공격적인 방법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그 모습이 오히려 세상을 바꾼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세상을 구한 것처럼 말이다.(어쩌면 한국교회가 이것만 알아도 나라를 구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살게 하신 이유이지,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다 주셨고, 그 법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꼭 부자가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가난하면 하나님께 민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부자면 복음 전하기 편리한 것이지 유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은 성령의 감동으로 전해지는 것이지 돈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고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만 본다면, 서울역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있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고, 수만 명이 모이는 화려한 교회의 건축물이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겪는 삶의 형편에 순종하면서 그 삶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표현해 가는 그 모습이 보는 사람에게 성령의 감동을 주는 그 법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안다면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명확하게 밝아지는 빛이 비취는 것이다. 하나님께 사람이 구해야 할 것은 자신의 삶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알면 어두운 방에 들어가서 방에 불을 밝힌 것 같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신과 세상의 법과 모든 것이 방 안의 비품들을 그 용도대로 사용하듯 사용법을 밝히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하는 것을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 구하고 그것을 알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다스리는 것이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상 지으신 목적이 모두 하나님의 표현하는 사람, 곧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인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졌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삶을 그것에 순종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왕이다. 세상의 권력과 정치로 다스려서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왕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죽기 까지 하는 왕의 법 안에 있는 삶을 사는 왕이다.


바로 그런 존재가 되기를 기도하라는 것이다. 바로 그 기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하는 소리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들으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들으심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고, 그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면서 까지 들어 주시려 작정하신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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