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사도는 증거에 대하여 계속 말씀하기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

이라 말씀하고 있다.


증거하는 이는 물과 피와 성령인데, 그 증거하는 이들이 증거하는 것이 바로 영생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온전한 것이다. 물과 피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셨고, 그 모습이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자기 안에 있는 그 변화를 성령의 역사라고 모든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는 마음이 성령의 역사임은 그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정체성은 분명해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그 모습은 사람이 아무리 죽이고 인정하지 않는 모습일지라도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온전한 생명이었기에 다시 실리실 수밖에 없는 생명이었다는 것에 대하여 명확하게 깨닫는 깨달음이 있을 때 성령의 역사하심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증거의 내용은 영생을 주신 것이라 했다. 이 영생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라고 하셨다.


안다는 것은 서로 상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대통령을 알지만 대통령이 자신을 아느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유대인들에게 안다는 것은 경험하고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저 여자를 안다는 개념은 동침했었다는 의미로 까지 통한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안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까지 안다는 것이다. 성경이라는 문헌에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그것을 잘 살펴보고 논리적으로 보니 예수님이 계셨다고 믿거나, 아니면 문헌적으로, 과학적으로 볼 때 뭔가 신빙성이 없는 것 같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그 모든 기적들을 일으켰다는 것을 믿는 마음이 믿는 것이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기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그런 능력을 가졌다고, 또 분명히 과학적으로 믿기 어렵고 오래된 신화 같은 이야기라 믿기 어렵지만 오늘날도 그런 기적이 간간이 일어나고 있기에 그것을 믿어야 한다고 하는 것과,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있어서 그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기적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아는 것은 다른 것이다.


왜 이렇게 안다는 것에 대한 차이를 두려 하는가 하면,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은 초인간적인 역량을 가진 분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떻게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사람이 어떻게 바다 위를 걷겠는가? 사람은 그럴 수 없는데 예수님은 그러실 수 있는 분이다." 라고 생각하면 예수님을 다 아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보내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을 보내셨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구원의 정체성에 대하여는 하나님과 사람들의 생각이 제법 다르다.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구원, 곧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은 십자가의 법인데, 사람들은 이상하게 피라미드의 법을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인데, 사람들은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사렛과 같은 천한 동네의 사람과 같은 그저 연약하고 공상하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 낱낱이 드러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큰 차이이고, 오늘날 교회가 점점 화려해지지만 오히려 지탄 받고 사람들은 떠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탈 인간, 그리고 세상의 법인 피라미드의 법을 좇아서 경쟁에서 이기고, 위대해지고 화려해지고 고상해지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의 정체성에 혼돈이 더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것은 오히려 피라미드와 경쟁의 법칙을 가지고 있는 세상의 법으로는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서 발가벗겨지는 것이다. 즉 인간이라는 정체성, 사람이 숨기고 싶은 모든 연약함이 완전하게 다 드러나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사람인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고백하고 시인하고 자신도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과 같은 운명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서 인정될 때 비로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을 듣는 이들에게 그것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면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겠는가? 그것이 모든 사람의 모습이고 그것을 인정하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 그 인간의 운명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알게 하려 하신 것이다. 그것이 처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심히 좋아하셨던 사람의 모습이다. 그 모습이 회복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온전한 사람의 모습고, 그 모습이 바로 구원이고 하나님께서 살았다 할 수 있는 생명이 있는 영생이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바로 그것을 증거하는 이가 바로 믈과 피와 성령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자신의 모습으로 고백하게 하는 영이신 성령인 것이다. 바로 그 고백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과 자신의 삶을 주신 목적을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낸 목적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의와 뜻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삶은 그 목적을 표현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시는 생명 곧 영생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아들이라는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