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고 그 대답에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세 번의 질문과 대답 후에 예수님께서 답변을 하신 내용이다.


이 말씀은 아쉽게도 원어적인 이해가 필요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을 물으셨는데 그 중에서 먼저 하신 두 번의 질문에 사용된 ‘사랑’이라는 단어는 ‘Agape’이고, 마지막 세 번째에는 ‘Philia’라는 단어라고 한다. 반면에 베드로의 대답 속에 있는 사랑은 모두 ‘Philia’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Agape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두 번 먼저 물으셨고, 베드로는 그 두 번의 질문에 자신은 “예수님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친구간의 사랑인 ‘필리아’의 사랑을 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답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을 확인하시고자 마지막에는 “네가 나를 필리아, 곧 친구처럼 사랑했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그렇다고 답을 한 것이다.


이 대화는 아주 묘하다. 표면적으로 본다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라 여길 수 있지만 실상은 예수님께서 물으신 아가페의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랑으로 나를 사랑했느냐는 물음에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너는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았느냐?”, “너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뜻하신 목적 안에서 나를 보고 사랑했느냐?”라고 물으시니 베드로는 “그것이 아니라 세상의 안목으로 사랑했었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십니다.”라고 답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그 관계와 의미로서 예수님을 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모습을 보면 ‘저 예수님은 누군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계집종이 물을 때에 그렇게 답을 했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서도 어부의 자리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신의 그런 안목과 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 자기 죄를 시인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예수님의 일을 맡기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일을 맡기신다는 것은 이제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베드로가 자신이 예수님을 어떤 안목으로 봤는지를 고백하고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자신의 사랑, 예수님의 안목과 자신의 안목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잔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베드로가 알았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21장은 이것을 말씀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마지막 교정? 아니면 화룡점정, 그것이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나다나엘 등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각대로 예수님을 믿었고, 그들의 생각과 다르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그런 생각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도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그 변화 없는 그들의 마음이 이끈 대로 자기 육신이 먹고 사는 일로 돌아가 버린 그들에게 찾아 오셔서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한 마디를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의 버전으로 하면, “너희 몸은 산제사로 드려라”가 될 것이다. “너의 삶을 오른편에 던지라”는 것이다. 인생에게 가장 바른 것, 바로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그 뜻 안으로 너의 삶을 던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그 아가페의 사랑을 하자는 것이다. 


사랑이란 서로에게 의미 있는 관계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고, 이는 인생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 사랑이니 그 사랑 안으로 오라는 것이다. 그 관계가 바로 바다 같은 세상에 떠 있는 배와 같은 인생에게 가장 바른 것(오른편)이라는 것이다. 


그 말씀 앞에 제자들은 “주님이시다”고 외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과 마주 앉아서 예수님께서 물으시는 것이다. “네가 나를 하나님의 뜻 안에서 관계있는 존재로 여겼느냐?”고, 그랬더니 베드로는(사실 모든 제자들은) “주님 그것이 아니라 저는 예수님을 인생의 안목으로 봤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게 고백한다는 것은 인생의 안목과 하나님의 안목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자신이 어디에 속했는지를 어떻게 고백할 수 있겠는가? 이제 베드로는 이전에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왜 저러고 계시는가?” 의문에 빠졌던 베드로가 아니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 존재인지, 예수님은 어떤 사람인지(어떤 사랑과 안목을 가졌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고백이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바라던 것, 제자들이 하나님의 안목을 알고,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고, 하나님의 의와 뜻과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를 바라신 예수님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은 상호 간에 온전해 진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뜻 하신대로 이 땅에서 예수님을 대신하는 그리스도가 되었고, 예수님은 이제 아버지께로 갈 수 있고 제자들이 만질 수 있는 분이 되신 것이다.(부활 바로 이후에는 이런 관계가 아니어서 만지지 말라고 하심)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의 이야기다.


세상을 살면서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이어야 실체로 보고, 그렇게 할 수 있어야만 존재로서 또 사실과 진리로 여겼던 안목을 가졌기에 그런 물질세계가 풍성해지는 것이 인생의 성공이고 하나님의 복이라 여기던 안목을 가졌기에 예수님조차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 예수님을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라 필리아(친구간의 사랑)로 보던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과 자신의 사랑이 어떤 차이인지를 알게 되는 것, 여기서 신앙이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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