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은 단지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사람, 육신을 가졌기에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는 모든 인생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 지어졌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육신으로 사는 인생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깨달아진다는 것은 자기 자신 역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것을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도 목적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목적을 알아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것이 자기 안에 들어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선 글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요셉의 아들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 앞에서 언제나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우리 모든 인생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하여 창조된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하신 것, 믿기를 원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구원을 받아야할 존재라는 것은 어떤 속 안에 있다는 것이다. 어디엔가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갇힌 자를 구하려면 구하는 자는 갇히지 않은 자라야 한다. 구하는 자 곧 메시아요 그리스도는 구하고자 하는 대상이 사로잡혀 있는 세계가 온전하지 않으며, 구하고자 하는 존재(사라)가 그 세계에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갇힌 자 역시 미운 오래 새끼와 같이 자기가 지금 있는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벗어나기를 원할 때 온전한 구속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인데 그것을 벗어나서 살다보니 당연히 목적을 벗어난 모든 존재와 같이 이런 저런 곤고함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보니 ‘삶은 고난’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나님께서 괜스레 사람을 고생시키려 만드신 것처럼. 더욱이 사람들은 그런 곤고함 속에서 자리는 바꾸지 않고 곤고함이 경감되기를 바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 마치 미운 오리새끼가 오리들 중에서 미움을 덜 받는 방법을 구하듯이.


하지만 미운 오리새끼는 백조다. 오리들하고 놀면서 미움 받을 존재가 아니다. 그때 하늘을 나는 백조를 보고서 자신의 정체성이 오리라 아니라 백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십자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니 ‘사람이란 존재는 이런 존재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과 같은 존재구나!’라고 깨닫게 되는 것과 같다.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이 원래 백조였다는 것을 깨달은 미운 오리새끼와 같이 세상은 곤고한 것이라며 어떻게든 그곳에서 곤고함을 줄이고자 애쓰던 인생들이 예수님을 보고서 “아 ! 우리의 자리가 이곳이 아니구나!”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구원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결국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도 예수님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생이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을 위하여 사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나와 나의 가족, 또 때로 세상의 일로 원수 같은 이들도 사람이기만 하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삶을 사는 존재가 되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모든 존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과 같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자신의 것이 되기만 하면 누구라도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이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그 외모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에 가면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잘못되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께 뭘 잘못했지?’라고 행위를 생각한다.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그렇게 판단한다. 심지어 행동을 보고 먼저 판단한다. ‘십일조를 안 낸다고? 그럼 신앙이 없고 부자 되기 힘들겠네?’라고 말한다. 그 사람의 존재 정체성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사람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것이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고,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다고 할 때 예수는 자기가 믿고 싶은 예수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은 하지 못하는 죽은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사람이 목적 안에 있지 않아서 죽은 자와 같이 그렇게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는 자리에서 사람을 구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대로,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신 대로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진 존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것을 믿으면 모든 사람은 다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산 자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호흡하고 있다고 산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존재의 목적 안에 있을 때 산 것이고 생명이 있는 것이다. 자동차는 굴러 다녀야 살았다 할 수 있고, 시계는 시각을 제대로 알려줄 때 살아있다고 하며, 전화기는 통화가 되어야 산 것이라고 하듯,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도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대로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으로서 그 육신의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생명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영이신 하나님을 육신으로 표현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삼은 사람은 생명을 얻은 삶이 되는 것이다. 창조하신 이가 뜻하신 목적 안에 있으니 그것이 산 것이고 생명이 있는 것이며, 그 안에 있으면 그 이름의 영원함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누구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자리로 가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고, 그것이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시는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름은 그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정체성을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하늘을 나는 백조를 보고 자신이 백조인 것을 깨달은 미운 오리새끼와 같이.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고 예수님의 이름, 곧 보여주신 정체성으로 인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 사도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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