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사도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요한사도가 밝히고 있는 이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알고 보면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기록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 신앙의 모든 것은 결국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과 예수님의 이름 곧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님께서 살아있고 생명으로 여기시는 유일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성경의 기록 목적이다.


그렇다면 먼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자. 어쩌면 이것은 상용구와 같은 명제가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아주 뻔한 것 같은 그 하나가 모든 것일 때가 있는데 이 말씀도 그렇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 그것이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라는 것에 토를 달지 않는다. 아마 이것에 대하여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렸다는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믿는 것이다.


어떤 예수? 예수님이 한 분인데 어떤 예수님을 믿느냐고? 의문스러울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신들이 알고 있던 예수님과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이 달라서 얼마나 혼돈스러웠는지 모른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에 있어서 어떤 예수가 그리스도이신지를 믿느냐는 것을 빼고는 이야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물 위를 걸으시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 내가 범한(Doing) 죄의 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신 예수님도 그리스도로 믿는 것 역시 어렵지 않다.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주시는 예수님도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 죽으면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부귀영화를 천국에서 누리게 해 주신다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옆집에 사는 아저씨가 그리스도라고 믿어야 한다면? 우리와 동일한 육신과 삶을 가진 평범한 사람,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영희나 철수와 같은 보편적인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면 이건 이야기가 다르다. 그것을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런 평범한 사람은 우리가 쉽게 그리스도라고 믿는 능력의 예수님과는 너무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리 쉬운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왕이요 제사장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의미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고,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를 임명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옆집 아저씨, 앞집 아줌마가 바로 왕이요 제사장이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하면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그 당시로 보면 지금의 옆집 아저씨나 이웃집 청년과 같았다. 이름 ‘예수’역시 우리나라의 철수, 영희 정도로 흔한 이름이었고, 신분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귀족은 고사하고 사회적으로 볼 때 전혀 고상하지도 않아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가난한 사람으로서 은행을 방문해서 대출을 받고자하나 여의치 않음을 알고 돌아서는 사람은 돈이라는 가치 기준에 의해서 멸시를 받은 사람이다. 시험에 떨어지는 사람은 학력이라는 기준에 미달하여 버려진 사람이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과 같았다. 이것을 알고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세상이 선하게 여기고 가치로 여기는 재력이란 기준에 의하여 멸시 받는 사람, 시험에 떨어진 실패자를 보고 그들이 바로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만든 존재라는 것을 믿는 것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하면 쉽게 믿어질까?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것, 그래서 요한 사도가 그것을 보고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것에 있어 어떤 예수를 그리스도로, 또 하나님의 아들로 볼 것이냐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바로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멸시 받고 버려지는 사람들, 세상의 가치로 볼 때 가난하고, 또 음란하기도 하고, 그래서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도무지 흠모할 것이 없어서 ‘저 꼴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나?’ 싶은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할 때 인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가난해야, 또 죄인이 되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죄인이 되어 죽으신 예수님의 일을 보고 듣고서 그 모습이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 ‘아멘’되어 살아가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볼 것이냐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되고 그것이 인정되는 사람은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실패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서 사는 사람이지, 세상 가치관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하나님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신으로 믿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며, 오천 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이다. 그렇게 세상적인 역량도 뛰어난 예수라야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들이기에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것이 신앙인의 모습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경건한 모양(외식)을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봉사도 해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남다른 경쟁력을 가진 사람이라 인정받으려 한다. 


이런 신앙은 자신들이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고 할지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항변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은 아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버림받고 멸시받은 예수님인데, 그와는 완전히 반대로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의 가치기준의 상위에 올라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앙인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그냥 패배자요 죄인이요 Loser일수는 있어도 그리스도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실패한 사람, 아니 세상의 가치로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리스도로 대접할 수 있는 심령이 없다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 아니다. 물론 자신들은 믿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곤란한 일은 몰라서가 아니라 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라는 말과 같이 그런 믿음 때문에 제대로 된 하나님의 계시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요한 사도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대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이 가치가 아닌 사람을 말한다. 사람을 볼 때, 그 외모나, 재력이나, 교양이나, 신분이나, 신앙적 공로나, 은사의 정도나, 사회적인 봉사활동의 내역과 같은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중심에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과 같이 죄인이라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알고 오직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한 존재라는 고백만 있다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받아들여지는 사람, 그런 사람이어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