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에 도마는 없었다. 도마를 만난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했다. 그러자 도마는 직접 예수님을 보고 창 자국 못 자국을 만져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서 8일 후에 도마를 포함한 제자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자신의 몸을 만져 보라고 하시고는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다>고 말씀을 하셨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 이것은 유명한 성경 구절이다. 어쩌면 이 말씀은 어쩌다 유명해진 말씀일지도 모른다. 때로 성경에 대하여 궁금해서 꼬치고치 캐묻는 사람에게나, 또 믿음에 증거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몰라서나 당황해서 혹은 귀찮아서 하는 답변과 같이 사용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따지지 말고 믿어라, 예수님께서도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다고 하셨다며.


지금 이 말씀에서 무엇을 두고 보았다 보지 않았다 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예수님이다. 도마가 보고자 한 것은 예수님의 육신 그 자체다. 그러니까 도마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육신, 그분이 그리스도이신 것이고 주님인 것이다. 그러니까 2,000여 년 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그 육신이 그리스도고 하나님의 아들이며 주라는 것이다. 그래서 도마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다.


그 훌륭한 고백의 답변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된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예수님을 보고서야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 보다, 예수님을 보지 않는 것이 아닌 보지 못하고서 믿는 믿음이 복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요셉의 아들 예수님만 주님이라고 여기는 것 보다, 요셉의 아들 예수를 보지 못해도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 순종하는 것이 복된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성경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꼬치고치 캐묻지 않고 시키는 대로 믿는 것이 복된 믿음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요셉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못 자국과 같은 증거를 기반으로 예수님의 일이 사실임을 믿는 것이나, 예수님은 실제로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 요셉의 아들 예수의 육신은 보지 못하지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의를 자신의 말씀으로 믿는 자가 바로 복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을 알아보는 것, 그것이 참 믿음이라는 것이다. 성경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복된 믿음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관점은 요셉의 아들인 예수라는 한 육신을 보고서 ‘저런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일 리가 없다.’며 죽여 버렸다. 즉 하나님의 아들을 육신으로 가늠한 것이다. 그것이나 도마가 못 자국을 만져 봐야 부활을 믿겠다는 것이나 같은 관점을 가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성경을 과학적으로 입증해서 하나님의 놀라움을 증명하겠다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니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므로 모든 신앙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가늠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자는 하나님이 축복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장로는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크고 화려한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건물의 화려함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것과 비교해서 뛰어나면 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가치관은 다 애굽의 가치관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가치관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세계는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창조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서로가 사람이란 존재는 연약하고 부족하며 또 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이후에 한 번도 사람을 개선하거나 바꾸신 적이 없다. 사람은 창조될 때 사람이나 지금이나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단지 그 사이에 사람이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과 세상의 일을 보고 <선>하다, <악>하다 판단하는 자리에 오른 일 밖에 없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사람이 판단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 일로 인해서 사람은 사람을 부정하게 여겼다. 그래서 사람은 이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원래 만드실 때 그 모습의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가장 온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예수님을 아들로 보내셨다는 것 자체가,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즉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연상하고 알 수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요셉의 아들 예수님이 아니라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을 믿는 것, 또 자신에게 그것을 알게 하는 자신과 같이 사회 속에서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부족하고 죄인 되는 사람을 하나님과 같이 여길 수 있는 믿음 그것이 복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복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요셉의 아들,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실체를 봐야 믿어지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알 수 있는 믿음, 그리고 요셉의 아들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뜻이 삶이 된 사람을 하나님과 같이 여기고 대할 수 있는 믿음, 그것이 복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아브라함도 사람을 보고 하나님을 대한 것과 같다고 했고, 야곱도 자신을 죽이려 하고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은 그 형(에서)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본 것 같다고 했고, 바울 사도도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이 하라고 했고, 예수님께서도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이 예수인 예수님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관점, 애굽의 관점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이 육신 가진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곧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복된 것이라는 것이다.


보지 않고 믿는다고 할 때 보지 못하는 것은 요셉의 아들 예수님이다. 그것은 객관적 실체의 대명사다. 믿음은 객관적인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있는 사람의 말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한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그래서 사람을 하나님과 같이 대할 수 있는 믿음이다. 그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려면 마음에 선악과로 인한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없는 사람이어야 하고,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며,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기 안에서 성령으로 잉태된 거듭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어느 시대 어떤 사회에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믿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보지 못하고 믿는 복된 믿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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