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삼일 째 되는 날에 제자들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는데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는 잘 개어져 있을 뿐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다. 그때 마리아가 울면서 무덤 안을 보니 천사 둘이 서 있었는데 그 천사들은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함입니다.”라고 답하고 돌아서 보니 예수님이 서 계셨지만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예수님이 살아나실 것이란 기대를 가졌을 정도로 사모한 예수님께서 옆에 서 계신데도 몰라 봤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모하면 꿈에서도 보이건만, 직접 마주하고 있는데도 몰라봤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것은 이후에 나오는 상황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르시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답하기를 랍오니 곧 “선생이여”라고 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

이라고 말씀을 하신다.


이 말씀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기 까지 하시고 또 부활까지 하셨는데 아직도 하나님의 일이 덜 끝났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내 형제들에게 이제 곧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전하라 하신 것을 보면 이제 올라가신다는 것이다. 아직 올라가지 못하였다는 것과 이제 올라간다는 사이에 있는 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이제 하나님께로 간다는 것을 예수님이 형제라 부르시는 제자들이 아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일에 조건이 있다면, 아니 올라가시기 전에 있어야 할 일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께 올라간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만지지 말라고 하신 이유 역시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아직 그 제자들의 사건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신 모든 일들은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의 일이 되고, 예수님의 정체성은 그들의 정체성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아직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일컬어 “형제”라고 하신 것은 주목해야 한다. 예수 안에 한 형제자매라는 상용구에 현혹되어 이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면 곤란하다. 형제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같은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형제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듯 제자들도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으로 회복되어야 하는 존재들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형제가 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신다는 것이다. 마리아에게 가서 “형제들에게”라고 하신 것은 이제 그들이 형제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가 하나님께로 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형제들에게 예수님의 아버지가 곧 그들의 아버지이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 모든 사람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그것을 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다르다고 해서 본질이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그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 될 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은행에 돈이 아무리 많아도 나와 상관이 없다면 그것은 휴지보다 못하다. 휴지는 흘린 국물 닦는 것에라도 쓰지만 내 돈 아닌 돈은 쓰면 쓸수록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나, 그리스도이신 것이나, 죽은 자를 살리신 일이 나와 상관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가 되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모든 일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저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 예수님은 그런 능력이 있으니 그 능력을 내게 베푸실 것이라고 믿는 것, 그리고 그렇게 믿으려면 예수님의 능력이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믿음이고 성경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냐는 것이다. 그저 예수님의 그런 능력을 내가 혜택으로 누리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한다는 것은 너무 허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없고, 내가 예수님과 같이 심령이 가난한 자를 먹일 수 없는데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것은 21세기 과학이 우주선을 우주로 보낸다는 것에 환호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 그것에 아무리 환호해도 내가 우주선을 타고 올라갈 수 없다면 별반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그런 뉴스를 소비하는 소비자로서 우주선을 쏘는 비용을 간접적으로 대고 있을 뿐이지.


신앙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고 하나님이었다면 우리의 아버지와 하나님도 여호와 하나님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아버지와 하나님이 존재의 하나님이시라면 오늘 우리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무엇인지가 신앙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무엇을 바치고 무엇을 해야 하나님께서 나의 먹을 것 입을 것을 잘 주실 것인지를 신앙하는 것은 존재의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 예수님의 하나님이요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 믿어지는 분이 아니었다. 그러니 엠마오로 떠나기도 했고, 만져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아직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의 하나님이 제자들의 하나님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하나님이 자신들의 하나님이 된 것은 성령이 오신 이후의 일이다. 즉 성령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또 제자들이 예수님을 대신할 사람, 예수님과 같은 생명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아버지가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고, 또 예수님의 하나님이 제자들의 하나님이 되시면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로 가시는 것이다. 아니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결국 그렇게 예수님께서 다시 하나님께로 가셔도 이 땅에는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살도록 하시는 것이었으니 당연히 하나님께로 가시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전에 말씀하신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생이란 그러라고 사는 것이니 삶의 의미와 목적이 회복되었는데 인생에게 있어 그보다 더한 유익은 없는 것이다.


그 제자들도 예수님을 지척에서 모시면서도 예수님이 이 땅의 왕이 되리라 생각했고, 예수님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이 누군지 몰랐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질 수 없었다.(만진다는 것은 같아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사 때 제물에 제사 드리는 사람이 안수하는 것과 같다.) 


그랬던 그들이 예수님의 형제가 되니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시는 것이다. 형제가 되었다는 것은 아버지가 같아지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아버지가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께서 오심이고, 이 모든 것은 제자들에게 유익인 일인 것이고, 이런 일이 있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고, 무엇보다 이것은 인생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며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날 이 땅에 사는 모든 인생들도 예수님의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생의 존재 목적이다. 그러니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를 의탁할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의 하나님,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존재의 신 여호와가 아버지가 되고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과 아버지가 같은 형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생들의 존재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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