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안에서 생각해볼 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도록 해 놓으면 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그건 하나의 딜레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딱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일을 하시지 않으실만한 이유를 쉽게 발견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딜레마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반문을 자아내기도 한다.


세상에는 가끔 사람들이 칭찬할 만한 일을 한 사람이 있어 사회적으로 칭찬하고 좋아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자작극이나 조작이거나 계획적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사건과 같은 일들이 있다. 또 비정상적 상황에서 고문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실토나 거짓말도 있다. 이런 모든 것은 다 자의적이지 않은 일들이다. 이런 일들의 특징은 <감동>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러 가겠다고 할 때, 제자들은 ‘그럴 수 없다.’고 만류했다. 베드로는 심지어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 중의 하나의 귀를 칼로 자르면서 까지 저항하기도 했다. 그때 예수님은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 26:53-54)

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이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계기 역시 성령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가지게 되는 생명의 시작은 성령의 감동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 성령의 감동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일을 사람이 듣고 보았을 때, 그 예수님의 모습에서 거울(놋 뱀)을 보듯 자신의 모습이 발견이 되는 성령의 감동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마음속에 탄생한다는 것이다.(그것이 성탄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억지로 하지 않는 나라인 것이다. 그러니까 감동을 줄 수 있는 자의적인 것, 더 본질적으로 본다면 생명이 그래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일 때 온전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것도 어떤 강압이나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삶에도 있는데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것에서 그런 예를 볼 수 있다. 부모도 사람인지라 자식들이 맘에 들지 않을 때도 많은데, 부모라는 그 정체성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자식들을 위하여 희생을 하는 것이 그것이다. 부모가 되면 자식을 위하여 어떤 것을 하는 것은 그 스스로가 어떻게 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금할 길이 없는 것이다. 자식이 나중에 자기를 잘 봉양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다.(물론 그것을 염두에 두는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런 사람에게 감동을 느끼지는 않지 않는가?)


그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스스로 그것을 금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목적, 어떤 이유로 인해서 자신은 싫지만 어떤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것도 그렇다. 적어도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살 동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죽어서 천국에 못가도 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믿는 것이다. 


다만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볼 때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어서 믿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 노후 대책이란 기대를 때로 생각하기는 해도 우선 자식을 키울 동안 부모라는 정체성으로 인하여 자식을 위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음, 그것 때문에 희생하고 봉사하듯이 예수님을 믿을 때 비로소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믿음은 곧 생계였던 시절이었다. 유대인들 사회에서 출교 당하면 시장에서 물건 하나, 빵 하나도 살 수 없는 그런 시절이었다. 그것은 협박이기도 했지만 신앙의 목적이 육신의 일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단순한 믿음의 행위가 아니라 육신의 삶을 보존하는 것에 관한 것이기도 했었다. 그것은 오늘날 예수님께 밥 달라, 배우자 달라, 돈 달라, 명예 달라, 그렇게 되어야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그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오늘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죽어서 천국 가야겠다는 목적 때문에 때로 싫지만 억지로 교회에 다니고 기도하는 것은 감동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의 감동으로 인하여 자기 안에 예수님을 믿는 생명이 잉태되고 그것이 자라서 자기 삶을 주관하므로, 때로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삶이 아니라면 감동이 없는, 어떤 이유와 목적으로 인하여 억지로 하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었을 때 그것이 진정한 믿음인 것이다. 천국 가겠지만 그 목적으로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모가 늙어 아들에게 기댈 수 있겠지만 그것을 목적으로 자녀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부모라는 정체성 때문에 자녀들이 자랄 동안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위하여 수고하고 희생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자기 안에 성령의 감동으로 잉태된 생명의 본성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아태가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라고 한 예레미아와 같은 마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런 마음이 아니라 다른 목적, 천국에 가는 것, 이 땅에서 성공하고 영광을 얻는 것과 같은 목적과 이유 때문에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았던 바리새인들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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