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을 섬긴다는 것은 그것 앞에 조아리기도 하고, 또 섬기는 대상을 위하여 자신이 수고하고 희생하며 섬기는 대상이 영광을 얻도록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또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섬기는 마음은 섬기는 대상의 바라는 바와 같아야 제대로 된 섬김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정말로 잘 생각해본다면 그 사건의 어떤 부분이 사람들이 육신으로 살 동안의 문제에 관한 것과 연관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자꾸 언급하는 것은 신앙의 본질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이유가 육신으로 살 동안의 평안과, 그 평안에 대한 대가로 드린 예물과 공로로 인하여 천국에서 다시 평안하게 산다는 것에 있는데 그것이 정말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즉 섬김의 대상의 정체성을 알고 그 정체성에 맞게 예수님을 섬기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 있는 자리>라고 하시는 것은 어떤 공간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리가 공간에 관한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그 어떤 누구도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같은 공간에 있었던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리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면서, 또 예수님을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육신의 삶이 겪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으로 믿으면서 예수님을 섬긴다고 한다면 다 거짓말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육신의 문제 해결을 예수님께 의탁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런 분이라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육신을 본질로 보는 시각은 <자리>라는 것이 공간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나올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밀이 죽어 밀이 나듯,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열매로 많이 나온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즉 자리란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공간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라 말씀도 하셨다. 그것은 자기가 볼 때 살아 있는 것, 즉 자기 기준으로 생명이 있다고 여기는 것을 사랑하는 자는 생명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혹은 영혼)은 세상에서의 삶, 곧 육신의 삶을 말한다. 이 생명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신앙적 안목의 표현이다. 무엇을 본질로 보느냐에 따라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의 자기 생명, 즉 육신의 삶을 사랑하는 이는 우선 <자리>라는 것을 공간의 문제로 본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만물 곧 눈에 보이고 나타난 것이 본질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치관 안에서 자리는 언제나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신앙은 예수님을 섬길 수 없다. 예수님과 같은 공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 교회에 주님이 계신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더 문제다. 예수님이 교회라는 건물에만 귀신처럼 있다는 생각이니 보이는 것을 본질로,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것을 더 확정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그렇다고 쳐도 교회에 육신이 가지 못한다면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또는 예수님이 마음에 계신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러면서 밥 먹을 때 기도하지 않는 것과 같은 육신의 행동을 용납하지 못하기도 하는 것은 또 어쩌랴?


예수님께서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가지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그 밀알로 인하여 많은 밀알이 나오듯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지신 생명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어 예수님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백 년 전의 사과나, 오늘 우리가 보는 사과나 그 길이 다 같은 것과 같은 것이다. 백 년 전의 사과나 오늘 우리 앞에 놓인 사과나 다 ‘사과’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그것이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예수님과 다른 곳에 있을 수 없다. 사과는 한국에 있는 사과나 미국에 있는 사과나 모두 사과라는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이다. 사과라는 생명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라고 할 때 그 <안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자신이 따라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섬김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라면 교회에 가서 청소하고, 또 성경을 읽는 것으로 부족한지 손으로 쓰고, 산에 가서 나무를 뽑을 듯이 기도하고, 길거리에서 큰소리로 전도하고, 사회적 지위를 바탕으로 교회에서 장로와 같은 직분을 얻어서 그 자격이 없으면 맡을 수 없는 교회학교 부장 자리 하나씩 맡아서 일하는 공로를 섬김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은 한 마디로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에 불과하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예수님이 밀알과 같이 죽으심으로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생명,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바로 이 육신의 삶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도 밀알로 죽으신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의지에 관한 것이 아니며, 육신에 관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들리신 예수님을 보니 그 모습이 자신의 운명이요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그 심령에서 생명의 본성이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생명과 같은 생명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 곧 예수님과 함께 있는 섬김의 삶일 진데 육신의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내려놓아진 예수님을 섬긴다면서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서 육신의 어떤 것(돈이나 세상의 지위)이 있어야 예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거짓말인 것이다.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던 그 심령의 생명 그것이 밀알과 같이 죽으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자신도 그 생명이 된 사람의 삶,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함께 있는 것이다. 같은 생명의 집합과 이름 안에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