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3:18-21) 하나님이 주시는 복, 구원(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8. 7. 11:12 Writer : 김홍덕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성경은 구원에 관한 말씀이다. 그 구원은 그리스도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하여 설명하시는 말씀이다. 이것을 사람에게 주셨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라는 말씀이다. 이를 위하여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오셔서 극악한 형벌을 받으시면서까지 보이셨다. 그게 성경이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의 능력이고 은혜다. 그리고 그 능력과 은혜는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증거가 분명하게 있다는 것은 그 증거가 없다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그 증거를 수 없이 많이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그 증거가 자신에게 없는데, 단지 성경이 구원을 말씀하고 있고, 그 구원과 구원의 주권자인 하나님을 믿는다고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고 착각이다. 많이 설명했지만 그것은 큰 죄일 뿐 아니라 회복하기도 힘들다. 구원을 받은 증거도 없이 스스로 혹은 대중성에 의탁하여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구원을 받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엘서의 말씀 안에서도 구원 받은 증거는 많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라는 2장 32절의 말씀도 증거를 받은 자의 외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32절 앞, 31절에서만 봐도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한 후에 여호와의 날이 이를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하는 것을 본 사람이라는 말이다. 자기가 옳다는 밝음, 밝을 때나 캄캄한 밤과 같은 세월을 비치는 자기 만의 빛이 어두워지는 세월을 보지 않았는데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말씀이다.


구원의 증거에 대한 말씀은 이 짧은 요엘서에서만 봐도 하나 둘이 아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물리적인 세상, 그리고 울이 자아 밖의 객관적 현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나의 구원, 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해가 어두워지듯 자기 밝음이 어두워지는 경험과 세월을 겪어야 구원이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다. 해가 어두워지기 전에 여호와의 신이 임하는 경험이 있어야 하고, 그에 앞서서 자신의 마당, 곧 자기 삶의 터전에 포도주와 기름이 넘쳐야 한다.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그 직임이 넘쳐야 한다는 것이니 온전한 제사, 곧 자기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앞서 자기 안에서 이방인의 가치와 생각과 의로움이 여호와의 적이 궤멸 당하듯이 쫓겨나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앞서서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여 그것을 의로 여긴 자기 신앙이 재앙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마음을 찢고 여호와 곧 존재의 신앙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런 과정들이 하나씩 자기 안에 일어나서 고백할 수 있는 체휼함이 있는 사람이어야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여호와의 신이 자기 심령에 있어야 여호와 하나님을 불러 구원에 이른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호칭으로 부른다는 의미나, 구원의 주권을 가진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나, 구원을 얻기 위하여 불러야 하는 이름이기에 부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여호와로 깨닫고 믿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존재의 신으로 믿는 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면,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고, 그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는 것이며 구원이고 영생이라고 믿는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은 눈에 보이는 외식이며 그것을 믿는 사람은 나타난 것을 본질로 인식하고 믿는 사람이기에 그 신앙이 외식이고 행위를 의롭게 여긴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얻기 위하여 교회에 열심히 가고(Do), 헌금하는(Have) 행위로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런 신앙은 예수님께서 ‘장사하는 것’, ‘회칠한 무덤과 같은 믿음’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하여 믿는 신이 설사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모두 메뚜기 떼와 같은 존재들이다. 재앙 그 자체다. 물론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육신의 일을 구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하나님, 곧 우상을 섬기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요엘서는 작은 성경이지만 그 속에 있는 구원의 조건은 아주 엄격하다. 이것은 구원이 어렵다는 말씀을 하고자 하시는 것은 아니다. 자녀들에게 우리는 “공부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가고 잘 산다”라고 이 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되면 그 이후에 제시된 것은 분명히 쉽다. 공부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 가는 것, 쉽다. 좋은 직장과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 역시 쉽다. 그러나 문제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어렵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죄를 자백한 사람에게 구원은 아주 쉽다는 말씀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 죄를 자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듣고자 하시는 자백은 ‘오늘 누구에게 화를 내었다’는 자백이 아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듣고자 하신다면 성전에서 남의 물건을 뒤엎고 화를 내신 예수님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이 듣고자 하시는 자백은 다름이 아니라 “내가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과 같이 육신의 일을 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라는 자백과 시인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백한다는 것은 바로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던 나의 모든 날이 재앙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 고백만 있다면 그때부터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주 쉽다. 사람은 구원 받은 존재로 살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존재가 그 존재 목적대로 사는 것이 가장 쉬운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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