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1:8-12) 제사 없는 슬픔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6. 15. 10:34 Writer : 김홍덕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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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와 전제는 곡식과 포도주가 쓰이므로 곡식과 포도나무가 없으면 드릴 수 없는 제사이므로 메뚜기 떼로 인하여 곡식과 포도나무가 상하면 제사의 제물이 없다는 합리적 당위성이 있다. 그와 같이 사람들이 대중성에 의지하는 신앙에는 열매가, 소산이 없으므로 그 신앙의 어떤 예배도 온전한 제사가 될 수 없다. 제물의 원료인 열매와 소산이 없기 때문이다.


크고 위대한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안목으로 보면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드리는 예배, 오늘날의 제사라 말하는 그 많은 예배들이 멀쩡히 드려지고 있는데 예배가 없다고 하는 것에 무리가 있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제사는 기본적으로 자신을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온전한 제사를 십자가에서 보이셨다. 세상의 가치로 볼 때 가장 낮은 자리로 가는 것에 자신을 드리는 것이 가장 온전한 제사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임을 보이신 것이다. 크고 위대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지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임을 보이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반대로 가고 있다. 오히려 세상의 가치로 심판 받아 낮아지신 예수님께 기도하여 예수님을 심판한 세상 가치로 높은 곳에 갈 수 있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고, 세상의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 하나님의,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 목적, 세상에서 높아지고 세상 가치로 귀한 것을 얻는 영광을 얻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참아가며 성경을 행동으로 지켰다는 공로와 육신으로 수고하여 얻은 돈과 같은 열매를 제물이라며 하나님께 드리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상태다.


오늘날, 아니 요엘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항상 있는 사람들의 이런 믿음과 신앙은 완연하게 하나님의 의와 뜻에 반하는 것이다.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가치로 성공이라는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것에 편승하고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의로움이 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제사가 끊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들이 세상의 가치 앞에 낮아지고 오히려 죄인이 되어 세상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 앞에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고, 종과 같이 섬기는 것에 자신을 드리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높고 위대한 것이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가진 하나님 아들이라는 기준에 적합하지 않다는 심판을 받아 십자가를 지셨다. 그 십자가가 더 이상이 필요 없는 단번에 드린 가장 온전한 제사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사는 이 십자가에 수렴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의 가치에 편승하여 이긴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그 소산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제사가 아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가장 온전한 제사인 십자가를 본받아 세상의 가치에 매여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 앞에 종과 같이 육신의 수고와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통해 보이신 뜻에 자신이 순종하는 것, 그것에 자신을 드리는 그것이 제사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을 내어주어야 하는 위대해지고 이긴 자가 선이 되는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그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제사라 여긴다.


좋은 곳에 취업하는 것, 고시에 합격하는 것, 사업이 번창하는 것을 교회 광고에 내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고 부러워하며 그 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수고와 공로의 결정체인 돈을 헌금한다. 그리고 또 세상에서 성공을 바라며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고, 성경을 잘 지켜 자신도 그 결과를 손에 쥐려 한다. 


그리고 이것을 추구하는 이들이 많으므로 이것을 의롭고 선한 것으로 둔갑시켰다. 메뚜기 재앙이 이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하나님의 제사가 있을 리 없다. 하나님의 의와 뜻, 그 반대로 가는데 하나님의 제사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슬프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슬프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라는 제사, 십자가를 통해 보이신 것이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에 자신을 내어 준다는 것이(드리는 것이) 온전한 제사가 된다는 것은 그것이 사람의 존재 정체성에 부합된다는 뜻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한 뜻에 순종하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목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대중성에 편승해서 위대하고 높은 것을 추구하고, 더 나아가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영광이라 믿는 것이 슬프지 않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보이신 사람의 존재 목적인 세상 가치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을 버린 것이다. 대중성에 자기 신앙의 뿌리는 두는 것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버린 것인데 그것이 슬프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에 자신을 드리는 제사가 없는 인생, 그것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것이기에 그것이야 말로 인생이 가진 가장 큰 슬픔이기에 메뚜기 재앙으로 제사가 끊어진 것을 슬퍼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슬퍼하는 것은 명령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슬퍼하라고 하신 것은 사람이 슬픔을 잊었다는 것이다. 메뚜기 떼와 같은 대중성에 편승한 신앙에 매인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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