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1:1-7) 대중성의 폐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6. 8. 10:21 Writer : 김홍덕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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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서에 나오는 메뚜기 재앙을 단순하게 하나님 앞에 타락한 백성을 심판할 목적으로 농사를 망하게 하신 재앙이 아니다. 이는 그렇게 백성을 굶주리게 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심이 목적이라고 하기에는 메뚜기 재앙이 가져온 폐해에 대한 요엘서의 기술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요엘서에서는 메뚜기 재앙으로 인한 결과를 굶주림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끊어짐”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점이 그렇다. 수많은 개체군에 의한 엄습으로 하나님께서 “나의 귀한 것을 앗아갔다”고 하신 말씀 속 귀한 것인 하나님을 섬기는 일일 끊어진 것이 메뚜기 재앙의 실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것이 요엘서가 기술한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살펴보면 이 메뚜기 재앙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속에서 과반수, 대중성, 중다함이 하나님 섬기는 일을 그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이 메뚜기 재앙이 어떤 말씀인지 온전하게 알 수 있다는 의미다.


우선 이 글에서 정의하는 대중성은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대중성 중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관한 것이 논점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단과 정통을 구분하는 대표적 기준이 이 대중성이라는 점이다.


잠깐 부언하면 사람들은 이단이라고 하면 사회적으로도 골치 아픈 행태를 보이는 집단으로 일반화하지만 사실 기독교에서 이단이라며 터부시하는 집단들 중에서는 그 행실이나 성경을 사모함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일반적인 기독교인이나 천주교인과 같은 종교인들이 본받아야 할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


종교는 사회의 일부인데(하나님을 믿는 것을 종교라고 여기는 관점에서 보면) 사회에 해악적이지 않고 도덕적이고 선량한데 단지 성경에 대하여 정통에 비추어 다른 해석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이단을 싸잡아 일반화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자신보다 도덕적이고 선한 사람을 매장하는 상당히 무례한 일일 수도 있다.


이단의 문제는 잠시 미뤄두고 다시 기독교 신앙,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대중성은 어떤 모습인지를 이야기해보자. 대중성이 가진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신앙의 근거, 믿음의 뿌리가 자기 안에 있지 않고 자기 밖에 있는 사람들의 수에 의지한다는 점이다.


많은, 아니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여기지 않는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은 물론,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표상인 교회가 늘 문제가 있다고 말할 뿐 아니라 자신이 ‘죽으면 정말로 천국에 갈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 교단, 신앙에 함께 한다는 이유 만으로 그 모든 의문과 문제가 해결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 요엘서가 말씀하고 있는 메뚜기 재앙, 곧 대중성의 폐해인 것이다.


신앙인들이 가진 그런 생각은 자신을 구원과 신앙에 온전한 존재로 착각하게 만든다. 아직 온전하지 않은데, 더욱이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우리는 부족하니 예수님과 같아 지기 위하여, 아니면 본받으려 노력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교회 다니고 신앙 생활하는 것은 구원받은 것이라고 하는 것에 자기 영혼을 의지하고 있는 상황이고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당연하게도 마땅히 자기 과정에 적합한 제사를 드리지 않게 한다. 아직 예수님과 같지 않기에 노력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죽으면 천국에 갈지 의문스럽다면, 나의 행위가 혹시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은 아닌지 의문스러운 지경에 있다면 당연히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부인하면 성경 전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회복한, 즉 동일한 존재가 된다고 말씀하시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을 위한 것인데, 아직 자신은 예수님과 다른 존재기 때문에 노력하여야 한다면 당연히 성경의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자기가 다니는 교회나 사회가 그것과 무관하게 교리나 교회 출석이나 헌금이나 간헐적 선행과 같은 것을 단초로 구원받은 사람 취급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 영혼을 대중성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기 안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밖에 있는 어떤 사람이나 조직이나 이론에 자기 영혼의 구원을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란 의미다.


이것은 결단코 구원을 얻지 못한 것이다. 구원은 생명의 법이다. 거듭남과 부활이란 말은 기계에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생명에 적용하는 말이다. 생명은 그 모든 본성이 속에 있다. 세포 속에 또 유전자 속에 있는 본성은 내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대중성이나 과반수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은 자기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 수가 아무리 많아도 내 육신 밖에 있는 존재에 나의 본성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자기 영혼의 구원, 그 영원에 관한 운명을 자기 속심령이 아닌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의 말에 자신을 의지하는 엄청난 바보짓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신앙인들이다.


이와 같이 자기 안에 구원이 없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많은 교회와 제도가 그렇다고 하니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하나님께 구원을 구하는 제사를 드리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메뚜기 떼로 인하여 하나님께 제사가 끊어졌다는 요엘서의 말씀이다. 바로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을 대중의 수에 의지하고 있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그 삶이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리지 않게 하고 있음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오늘날의 예배, 자기 안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 대중성에 자기 영혼을 의탁한 사람들의 예배는 하나님이 보실 때 전혀 제사가 아니라는 것을 함께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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