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과 아스닷(이방인 아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11. 15. 07:00 Writer : 김홍덕

이번 글에서는 요셉의 아내 아스닷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합니다. 요셉의 아내 아스닷은 창세기 41장에서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아들을 낳았다는 기사 외에는 성경에 달리 언급되지 않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하는 것은 그녀가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 아내를 취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보통 좋아하지 않으셨는데 이 요셉은 그 이방인 아내에게서 난 아들이 이스라엘 지파가 되고 에브라임은 후에 북왕국의 왕족이 됩니다.




에서는 안 되고, 요셉은 괜찮다?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의 형 이삭의 장자 에서(창 26:34)도 이방인 아내를 취했습니다. 이삭과 아내 리브가는 그 아들 에서가 이방인 아내 취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동생인데 그 일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 곧 이스라엘은 나중에 자기에게 손자가 되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기 양자로 삼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왜 에서는 이방인 아내를 취한 일로 좋지 않은 결과를 얻게 되고, 예수님을 상징한다는 요셉은 이방인 아내, 그것도 애굽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삼았는데, 그 사이에서 난 아들들이 이스라엘 왕국의 지파로 편입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을까요? 특히나 애굽 제사장이라면 태양신이나 바알을 섬기는 신앙을 이끄는 제사장이고 그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단순히 이방인 여자 이상의 의미가 있을 텐데 말입니다.


요셉은 아내를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바로의 꿈을 해석하므로 총리대신이 되면서 바로 왕이 그 나라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닷을 아내로 주므로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강제로 결혼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요셉이 결혼을 하겠다는 뜻을 비친 것도 아닌 상태에서 바로 왕이 일방적으로 혼인하게 한 것입니다.


반면에 에서는 자기가 가서 자기가 좋은 대로 이방인 아내를 취하므로 그 부모 이삭과 리브가가 근심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 이삭의 염려는 곧 하나님의 염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에서는 자신의 의를 가지고 이방인의 아내와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래도 좋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결혼은 남자 안에 있는 의를 여자를 통해 표현하는 것



결혼이라는 것은 <내용과 형식>이란 주제로 쓴 글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남자는 내용인 의를 의미하고 여자는 그 의를 표현하는 형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여 아들을 얻으면 그 성을 남편의 성을 따릅니다. 생각해보면 아이는 여자가 임신하고 그 몸에서 자라다가 여자가 낳는데도 그 성을 남자의 성을 따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남편 집안의 아이가 됩니다. 즉 남편의 혈통으로 대표되는 의, 그 내용이 여자인 아내를 통해서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육신 가진 삶으로 표현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가 신랑이 되시고 교회가 또 성도가 신부로 말씀하시는 것 역시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혈통, 즉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본성과 성품이 각 사람의 육신 가진 삶으로 표현되고, 그 사람들이 모인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하는 곳이기에 그리스도는 신랑이 되고 교회와 성도는 신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서도 요셉도 그 본성 안에 있는 정체성이 그 아내를 통하여 아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이방인 아내를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에서가 가진 신앙 정체성이 세상의 형식을 통해서 자신이 가진 의를 표현해야겠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 날 교회가 세상의 법칙인 경쟁의 방식에서 성공한 사람을 목사로 청빙하고 또 장로로 선출하는 것을 의롭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좀 다릅니다. 요셉이 이방인 아내를 얻은 것은 자기의 의가 아닙니다. 바로가 주선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상세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좀 추측해 본다면 바로가 자기 통치를 위임하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사람을 아내로 주지는 않았을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상황이 요셉은 약간의 시차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옥에서 막 풀려난 신분인데 바로 왕이 주선하는 것을 거절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여자, 아내가 형식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요셉은 자기의 의사가 아니라 바로 왕, 곧 세상이 요구하는 요구에 의하여 아내를 얻은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인데 굳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왕의 애굽을 구해야 하듯, 죄에 빠진 육신을 가진 인생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그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자기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은 것과 예수님께서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되는데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연약한 육신을 입으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 오늘 우리와 어떤 상관일까요?




우리의 육신은 아내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



그것은 우리가 육신이라는 아내와 같은 이 형식을 가진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이 육신의 사용법, 목적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육신이 편하고, 보통 사람들이 육신으로 하기 힘든 일들을 많이 일들을 할수록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누구나 굶으면 힘든데 금식 기도를 하면 좋은 신앙이라 하고, 잠을 자지 않는 철야기도를 많이 할수록,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면 좋은 신앙이라 하고, 또 누구나 어려워하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세상에서 성공하면 또 그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좋은 신앙, 세상에서 영광을 얻은 결과를 가지고 대우를 받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육신은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이란 그 어떤 분야에서라도 더 가진 것이 있게 된다면 그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렇지 못한 자를 위하여 그 육신을 수고하여 섬기기 위한 것 그것뿐입니다. 신앙이 더 좋다면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보고서 스스로를 돌이킬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육신을 사용하는 것이고, 세상의 어떤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면 그 역시 이기지 못한 이들이 보고서 스스로 깨닫고 얻을 수 있도록 살아내는 것을 위하여 육신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표상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본체시자 아들이시고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도록 그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모습을 보고서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아내와 같은 육신을 입으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을 가진 삶에서 이 육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즉 인생의 존재 이유와 목적과 그 의미를 보이신 것이 그것입니다.


요셉이 이방인인 여인을 아내로 삼은 것은 애굽에 닥칠 기근에 대비하는 자로서 세움을 받는 것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이방인, 그것도 애굽의 신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삼는 혼인을 하게 된 것은 세상의 가치관 안에서 그 존재의 이류를 찾지 못하는 기근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 가치관을 형식으로 취하여 그 기근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이것이 우리 삶에서는 이렇게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 다니는 사람을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회사생활과 교회의 일정이 겹치면 고민을 합니다. 그런 갈등에서 많은 경우 교회를 선택하면 좋은 신앙이 됩니다. 물론 이것은 신앙 이외의 문제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요일에 회사 야유회로 등산을 간다고 하면 신앙을 떠나 산이 싫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회사가 아니라 교회를 선택하면 교회에서 칭찬을 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이 요셉의 이야기, 자기가 원한 것이 아닌데 이방인 아내를 맞이하는 것, 즉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이방의 것을 덧입게 되는 모습은 회사와 교회가 겹칠 때 회사를 선택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세상의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되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이시면 되었는데 굳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앞의 예로 돌아가 본다면, 회사에 같이 다니는 사람은 교회 다니는 사람을 알 것입니다. 그가 교회에 가고 싶어 하고 또 좋은 신앙(평소에 그리 살아야겠지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지간하면 알 것입니다. 그런 그가 회사에 급한 일이 있고, 다른 직원이 힘들어하거나 어려워하는 일을 하러 교회를 뒤로 하고 나왔다면 그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요?


어떤 사람은 ‘저 사람도 별 수 없구나! 먹고 살려니 신앙을 버리네.’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 신앙이 있을 텐데 우리 일을 도우러 왔구나! 저런 신앙이라면 나도 가질만하네.’라고 생각하기도 할 것입니다. 육신은 이렇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후자의 사람들, 그 사람들 마음에 ‘나도 저렇게…’라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 그것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셉이 원치 않게 이방여인을 아내로 삼아 자기 의를 표현해 낸 것이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진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회사일과 교회일이 겹칠 때 회사에 일하러 간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듯이.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백부장은 그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았습니다. 마치 교회 다니는 사람이 회사 직원들을 도우러 왔을 때 그것을 보고 ‘나도 저런 신앙이라면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든 사람처럼. 구원의 대상은 그런 사람들이고, 또 그런 사람 하나를 찾기 위해서 양 99마리를 버려두고 찾으러 나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육신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이 세상의 형식을 덧입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삶이라는 것은 놀라운 비밀도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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