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1장, 막 11장)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셨다. 유월절은 유대인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기여서 가신 것 같지만 실상은 예수님 자신이 유월절의 어린양이시기에 제물이 되려고 가시는 것이다. 죽임 당하는 그리스도라서 죽으러 가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환호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치며 자기 옷을 벗어서 예수님 가시는 길에 깔면서 환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는 그리스도를 환영한 것이 아니다. 육신과 민생의 문제를 해결할 그리스도를 환영한 것이다.


다음날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 시장하셔서 무화과 열매를 찾았지만 열매가 없음을 확인하시고 그 나무를 저주했다. 그 나무는 이후에 말랐다. (막 11:20-21) 이상한 것은 유월절 때는 무화과가 열매를 내는 시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화과가 열매가 없다고 저주했다. 무화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것이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나라 목(木)이다. 국가를 상징하는 나무다. 유대인들을 상징하는 나무라는 의미다. 그 나무에 열매가 없고 잎사귀만 무성했다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함은 풍성한데 열매가 없다는 말씀이다. 행함만 풍성하고 행함의 근원인 생명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의 환호다. 그리스도를 크게 환대하는 것 같으나 열매와 같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신의 문제, 민생의 문제 그리고 더 나아가 나라의 독립을 해결해 주는 메시아를 기다렸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이 독립기념일 같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입성하니 기다려온 메시아라 기대하고 믿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 되지 않아 강도인 바라바와 예수님을 바꾼다. 예수님께서 독립은 고사하고 허무하게 잡혀서 심문을 받는다고 하니 그럴 바에 폭력적인 바라바를 선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바라바를 선택했다. 그들에게 열매가 없다는 것이 그렇게 드러난 것이다.


열매가 없다는 것은 생명의 존재 목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앙의 형식이야 날이 갈수록 무성해진다. 그 뿐 아니라 그 무성함을 심화시키고 화려하게 만드는 값비싼 음향, 영상 장비와 온라인 예배 시스템과 같은 것은 날로 발전한다. 그렇게 사람을 모아 구원을 전파하고, 강단에 서서 “당신들은 구원 받았습니다, 은혜를 구하시오”라고 외치지만 정작 사람들은 자신이 죄 없는 사람이라 말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람들의 그런 죄책감을 덜어 줄 목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니 예수님과 같이 되기 위해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성경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라고 외친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당신들이 바라는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주십니다.”라며 방점을 찍는다. 오늘날의 신앙은 이렇게 무성하지만 정작 자신이 죄 없다고 말하지도 못하는 신앙이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신앙이다.


그와 같이 잎만 무성한 신앙, 화려한 교회, 끊임없이 노력이라는 행위를 독려하는 신앙 속의 그리스도는 당연히 형식이 화려한 그리스도다. 교회를 크게 건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고, 은혜가 넘치는 교회며, 크고 화려한 건축물은 또한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는 세상의 가치 곧 돈으로 비싸고 좋은 것, 수와 양으로 볼 때 많고 큰 것이 하나님 아들이자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합당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신앙은 예수님의 저주를 받는 신앙이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가 전하는 그리스도와 반대의 그리스도니 굳이 저주를 하시지 않아도 그 자체가 이미 저주다. 사람이 자기를 조성하신 이의 목적 밖으로 나갔으니 그것 자체가 저주인 것이다. 예수님이 저주하시자 잎이 마른 것처럼, 사람이 육신으로 성경을 지켜내는 것은 결국 한계가 있는 일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입성할 때 사람들이 환호했던 것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인함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고 오천 명을 먹이는 예수를 환영한 것이다. 열매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이 기대하고 마음대로 정의내리고 고대한 무성한 나뭇잎과 같은 기적을 행하시는 메시아로 예수님을 착각하고서 환호했다.


오늘날의 신앙도 그 날의 유대인들과 같이 기적과 같은 공로와 업적에 환호한다. 설교할 제한된 권한을 가지는 목사들을 보면 신학이라는 공부에서 피라미드 위로 올라간 업적을 가지고, 교회에 시무하는 동안 또 어떤 업적과 성과가 있는지를 경쟁하여 더 높은 곳에 오른 자를 더 많은 돈을 주고 청빙해 온다. 성경과 신학이 종목이라고 높아지려는 본성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하나님 말씀의 본체이신 예수님도 낮아지고 낮아져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성경과 신학은 높아지는 것이 은혜롭고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육신의 공로로 이긴 자가 시스템으로 세운 교회의 신앙은 모든 것이 행위와 공로 위에 있다. 물론 말로는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당장 예배를 빠진 주간에 약간의 불의한 일을 당하면 ‘예배를 가지 않아서 그런가?’ 의심하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목회자에게 험한 말 하면 저주 받는다.’, ‘십일조 떼 먹으면 경제적인 손해를 반드시 본다.’와 같은 말들은 사람들이 얼마나 행위와 공로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지 증명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행위에 주목하는 것은 나름의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 행위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함이다. 하나님께 성경을 지키는 행위, 예를 들어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부유함을 얻으려 한다. 알고 보면 기독교 신앙은 모두 이와 궤를 같이 한다. 기도하는 이유도, 성경을 보는 이유도, 착하게 사는 이유도 모두 그렇다. ‘착하게 살면(행동하면) 복 받는다’는 세상의 일반 논리에 착하게 사는 이유를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고, 그렇게 하면 복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라고 회 칠한 것 뿐, 세상과 같은 이유, 같은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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