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를 비롯한 사도들의 모든 편지는 대부분 서신의 목적과 수신자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에베소교회에 보낸 이 서신도 에베소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신실한 성도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도들은 바울사도와 같은 생명의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사도가 서신의 마지막에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줄 것을 당부고 그것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과 바울사도가 본성과 추구하는 것이 같다는 것을 분명하게 합니다. 같은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종이 되고 갇힌 바울사도와 같은 생명을 가지고 같은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에베소서의 수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이것을 성경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사도가 에베소교회에 보낸 이 서신을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 예수님께 육신의 평안을 구하면서 그 대가로 옥에 갇힌 바울사도의 서신대로 행함을 드리려고 한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의 사정을 에베소의 성도들 그리고 오늘날 에베소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이 서신을 기록하고 그것을 두기고라는 사람을 통하여 전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두기고는 에베소서 외에도 사도행전 등에도 나오는데 트ᅟᅳᆨ히 골로새서 마지막에도 바울사도의 형편과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언급됩니다. 즉 두기고는 바울사도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사도가 자신의 사정을 왜 알리려고 하는지 또 그렇게 알리고자 하는 사정의 내용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것은 에베소서의 기록 목적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에베소서의 수신자들의 성격과 연결된 것입니다. 바울사도와 의와 가치관이 다른 사람이 바울사도의 사정을 알 이유도 관심도 없을 것이고 위하여 기도하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 에베소서를 기록하고 있는 바울사도의 사정은 옥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옥에 갇힌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복음을 전한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이 표면적인 이유를 성도들이 알기 원해서 바울사도가 자신의 사정을 알기 원한다고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게다가 오늘날은 전도한다고 옥에 갇히는 일도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없기 때문에 오늘날 성도들이 알아야 할 사정은 아닌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성도들이 알기 원하는 자신의 사정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를 지는 삶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는 것은 그 삶을 인하여 마치 옥에 갇힌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삶을 육신의 정욕이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중에는 원치 않은 곳으로 끌고 갈 것이라고 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인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어떤 사정인지를 성도들이 알기 원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것은 큰 비밀입니다. 하나님을 믿어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추구하는 어두운 눈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큰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보물찾기를 위하여 감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놋뱀과 같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므로 그것을 제대로 보기만 하면 자신의 것이 되지만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믿기에 보이지 않아서 비밀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사형수가 되어 돌아가셨는데 그 예수님께 세상에서의 성공과 육신의 평안을 구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비판이나 비난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질적인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그렇게 날 선 공방을 하신 것들이 유대인들의 신앙과 세태에 대한 비난이나 책망이 아닙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음의 일부입니다. 온전한 것을 전하면 온전치 못한 것은 다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속한 사정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는 사정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과 다르면 말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가 바로 바울사도가 성도들이 알기 원하는 사정의 본질인 것입니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매인 것임을 알기 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매였다는 것을 자유의 구속이라고 터부시하지만 의외로 많은 것에 스스로 매이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이성간의 사랑과 결혼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자녀를 원하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삶의 좌지우지하는 구속인데 그것에 스스로 매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기도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와 같이 어떤 매임은 그것이 옥에 갇히는 것과 같이 강력한 구속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아니 오히려 스스로 그것에 매이려고 하는데 그럴 수 있는 유일한 원인인자는 다음이 아니라 본성입니다.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본성이 아니면 자기 육신이 상할 것을 뻔히 알면서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력한 의지에서 비롯된 모습을 보여주면 타고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도 자신들을 복음 전하는 것에 보내달라고 간구하고 심지어 다시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려고 마음도 먹어 봤는데 마음이 불타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본성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람을 그렇게 이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도, 바울사도도 스스로 매인 자가 된 것도 다 이를 인함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서신도 바로 그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성도, 곧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 사정을 알아야 하는 것은 그들의 운명도 바울사도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치 않는 것으로 띠 띠우고 끌고 갈 것이니 그리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을 두고 예수님께서도 싫지만 인류를 구하려면 해야 하는 것이라서 예수님께서 신념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본성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갔다는 것을 스스로 압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예수님을 전한 사도들이 알기 원했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는 사정이 자신들에게 동일하게 임했고, 그 본성이 자신의 삶을 이끌고 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사도가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알기 원했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본성이 이끄는 삶의 사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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